부산시청 도서요약

역사는 늘 산맥처럼 굵게 기록되지만 사람의 삶은 골짜기처럼 세밀하게 굽이친다. 그 골짜기의 결을 읽어내는 문학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이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다시 세우게 만든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나림 이병주 문학을 다시 읽는 법

- 서른 개의 인문 클래식으로 펼쳐지는 질문의 지도

나림 이병주 문학을 인문 클래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한 작가의 작품 목록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견디고 선택했는지를 묻는 질문의 지도를 펼쳐 보는 일에 가깝다. 방대한 세계는 보통 연대기나 대표작 중심으로 요약되기 쉽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주제라는 렌즈를 통해 문학을 다시 배열한다. 작품은 줄거리의 순서가 아니라 사유의 순서로 재배치되고, 독자는 작품을 따라가는 동시에 자신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틀을 점검하게 된다. 이때 문학은 과거를 묘사하는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사고를 교정하고 확장하는 장치가 된다.

고전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을 만드는 도구다

"고전은 상상력의 보고이다. 문제가 문제인 것은 당장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전의 의미는 즉문즉답의 해소책 제시보다는 상상력의 제공에 있다. 나림은 고전에서 답안보다는 문제 설정의 방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이 문장은 고전을 대하는 태도를 단번에 바꿔 놓는다. 사람들은 고전을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한 창고로 착각하기 쉽지만, 고전은 대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생각의 지평을 넓혀 주고,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 보게 만든다. 결국 고전의 효용은 처방전이 아니라 시야이며, 당장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를 견디게 하는 힘에서 나온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단정적인 답을 내는 사람의 말이 더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대개 결론의 부족이 아니라 질문의 오류다. 고전은 그 오류를 바로잡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역사는 산맥이고 문학은 골짜기다

"현자는 역사를 즐겨 읽지만 믿지는 않는다. 신뢰할 수 없는 역사의 빈곤을 채우는 게 소설의 역할이다.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이는 그 목격이 어떤 방향을 지향하는지 분명히 말해준다. 산맥은 굵고 웅장하지만, 그 아래 골짜기에는 사람의 집이 있고 숨이 있고 생활이 있다. 역사는 종종 승자와 제도의 언어로 정리되며, 개인의 표정과 숨소리는 통계로 환원되거나 아예 빠져버린다.

소설은 그 빠져버린 영역을 되찾아 온다. 그리고 그 영역은 단순한 감상적 보충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놓치기 쉬운 윤리의 핵심을 담고 있다. 누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그 결정을 하게 만든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그 결정으로 누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가, 그 대가는 지금도 반복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 핵심이다.

폭력의 시대를 통과한 실존의 윤리

"사람을 살리는 사상, 사람의 체취가 물씬 나는 사상을 염원했던 휴머니스트 나림에게 이 어이없는 옥살이는 가슴의 고슴도치로 남았다. 사람은 통분을 안고 살 수는 없다. 해원 해야 산다."

문학과 인문학이 왜 현장에서 시작되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사상은 말로만 존재할 때 쉽게 장식이 되지만, 인간이 실제로 겪은 부당함과 폭력 앞에 놓이면 사상은 생존의 형태가 된다. 통분을 안고 살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문턱을 말한다.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세계를 신뢰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윤리와 공동체는 서서히 부서진다. 그러므로 해원은 개인의 감정 정리가 아니라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 된다.

환각으로서의 예술, 흔들림으로서의 진실

"마술사는 한편의 잘 조작된 환각이다. 책을 덮고도 그 마술이 사실인지 환각인지 긴가민가하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도 환각이란 나림의 뜻이 느껴진다."

이러한 통찰은 문학의 진실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만든다. 환각이라는 말은 허구라는 뜻처럼 들리지만, 여기서 환각은 오히려 현실이 가진 단단함을 흔드는 체험에 가깝다. 사람은 사실을 알면 움직일 것 같지만, 사실만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이 만들어내는 의미, 그 의미가 불러오는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구성하는 세계관이다. 예술은 그 세계관의 틀을 잠시 흔들어,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믿던 것을 상대화하게 만든다. 그래서 책을 덮고도 긴가민가한 상태가 남는다면, 그 긴가민가함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일 수 있다. 확신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확신을 잠시 멈추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틈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조건을 거부하는 역설, 고전의 즐거움

"고전 읽기의 의미는 책 한 권을 통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수발한 두뇌와 깊은 인정을 만나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인데, 행복어 사전은 고전 더미에 풍덩 빠지는 즐거움 한마당이다."

고전은 종종 어렵다는 선입견으로 멀어진다. 그러나 고전의 진짜 매력은 난해함이 아니라 대화 가능성에 있다. 시대가 달라도 인간이 고민하는 질문의 핵심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랑과 죽음, 권력과 정의, 공동체와 배신, 욕망과 절제 같은 주제는 형태만 바뀔 뿐 계속 반복된다. "행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단연 거부해야 한다"는 역설은 특히 오늘의 삶에 정면으로 부딪힌다. 현대 사회는 행복을 조건화한다. 더 나은 직장, 더 높은 소득, 더 좋은 관계, 더 건강한 몸, 더 많은 성취가 행복의 전제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조건이 늘어날수록 행복은 멀어진다. 조건을 거부하라는 말은 무책임하게 살라는 뜻이 아니라, 행복을 심사표에서 꺼내라는 뜻에 가깝다. 행복은 결과물이 아니라 감각이며, 감각은 오히려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좌절을 통과한 인간을 존중하는 시선

"나는 버거운 일을 하다가 좌절한 자를 좋아한다."

이러한 니체의 아포리즘을 나림이 반복해 인용했다는 대목은 성취의 찬가가 아니라 시도의 윤리를 말한다. 좌절은 실패가 아니라 세계의 저항을 체험한 결과다. 좌절한 사람은 대개 자신이 부족해서 무너졌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그 좌절이야말로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단단한지 알게 해주는 계기다. 좌절의 경험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은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문을 연다. 그 문이 열릴 때 문학은 개인의 자존과 상처를 넘어 공동체의 윤리로 확장된다.

산을 내려가야 하는 사람들의 결말, 그리고 평등

"아 그립다. 기인과 대인의 시대. 살아 있는 사람은 일단 산을 내려가야 한다. 이 땅에 생을 받은 사람이라면 좋거나 나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모두 이 산하로 화하는 것이다."

이는 삶의 결말을 대하소설의 호흡으로 끌어올리면서도, 결국 모든 삶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담담히 말한다. 이 담담함은 허무가 아니라 평등의 감각을 준다. 성공과 실패, 명예와 치욕, 정의와 오해가 뒤엉킨 시대를 지나도 결국 남는 것은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일이다. 모든 논쟁이 사라진 자리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으로 환원되고, 그 환원 속에서 윤리의 기준이 새로 세워진다.

다음 세대를 위한 인문학적 길잡이

인문 클래식이라는 형식은 작품을 요약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던지는 질문을 지금의 언어로 다시 꺼내는 장치다. 청소년과 청년에게 특히 의미가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답을 빨리 찾는 기술이 익숙해질수록 삶의 문제는 더 풀기 어려워진다. 관계의 선택, 진로의 방향, 정치적 신념과 개인의 윤리, 사랑과 책임 같은 것들은 정답이 없는 문제로 남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설정하는 능력이다. 고전과 문학은 바로 그 능력을 키운다. 무엇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 무엇을 의심할 것인지, 무엇을 끝까지 붙들 것인지의 기준을 만들어 준다.

질문을 남기는 문학, 오늘을 지키는 사유

나림 이병주 문학을 인문 클래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시대의 폭력 속에서도 사유를 놓지 않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역사가 산맥이라면 문학은 골짜기이며, 그 골짜기의 디테일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을 이해하는 길을 얻는다. 고전은 답을 주지 않지만 상상력을 주고, 상상력은 타인의 삶을 내 삶의 질문으로 바꾸는 힘이 된다. 그 힘이 있는 한, 문학은 과거를 기록하는 장르가 아니라 오늘의 판단을 단단하게 만드는 인문학의 한 형태로 남는다.

핵심 메시지

고전은 해답의 창고라기보다 상상력의 보고이며 좋은 질문을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지식의 중심이 된다. 역사는 믿기 어렵기에 소설은 빈틈을 메우고 골짜기의 디테일로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드러낸다. 극단의 시대를 통과한 실존의 감각은 오늘의 삶에서도 여전히 판단과 공감의 기준을 새로 묻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