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은 전쟁을 막는가, 전쟁을 준비시키는가
- 공장과 공급망, 시장과 기업으로 읽는 안보의 정치경제학
전쟁의 향방은 첫 총성이 울리기 전부터 달라진다. 무엇을 생산하고 누구와 거래하며 어떤 공급망에 의존하는지가 국가의 힘과 선택지를 바꾼다. 군사 지도만으로는 보이지 않는 안보의 경제적 지도를 펼쳐볼 때다.
[Key Message]
* 전쟁은 총성이 울리기 전에 시작된다. 국가의 생산능력과 기술, 에너지와 물류망은 무기만큼 중요한 안보 자산이다. 평상시의 산업 및 공급망 선택이 위기 때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선택지를 결정한다.
* 무역은 평화의 끈이자 압박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상호 교역은 전쟁의 비용을 높이지만, 의존이 한쪽에 치우치면 경제적 강압의 통로가 된다. 교역량보다 단절될 때 누가 더 큰 피해를 입는지를 살펴야 한다.
* 효율적인 공급망이 반드시 안전한 공급망은 아니다. 가장 저렴한 공급처와 최소 재고는 평상시의 비용을 줄이지만 위기에는 치명적인 병목을 만들 수 있다. 가격과 납기뿐 아니라 대체 가능성과 복원력까지 함께 관리해야 한다.
* 경제와 안보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공식은 없다. 경제성장과 세계화는 사회를 안정시키기도 하지만 자원 경쟁과 테러, 내전의 조건을 만들기도 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작동하는 구체적인 경로와 조건을 나누어 살펴야 한다.
* 기업은 지정학의 관찰자가 아니라 안보의 당사자다. 생산지와 거래처, 기술 이전과 데이터 보관에 관한 결정은 국가 간 의존구조를 바꾼다. 기업의 공급망 전략은 비용관리인 동시에 경제안보 전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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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보다 먼저 움직이는 돈과 공장
전쟁을 떠올리면 탱크와 전투기, 미사일과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먼저 보인다. 그러나 전장에서 총을 쏘려면 총알을 생산하는 공장이 필요하고, 공장을 가동하려면 전력과 원료, 기술자와 운송망이 필요하다. 병사에게 지급할 급여부터 식량, 의약품, 통신망까지 생각하면 안보는 처음부터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화려한 무기체계 뒤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수많은 계약서와 생산라인, 세금과 국채가 놓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보여준 힘도 전투 기술에만 있지 않았다.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만들던 공장들이 전차와 항공기, 군용 차량 생산시설로 전환됐다.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은 ‘민주주의의 병기창’으로 불렸고, 막대한 산업 역량은 연합국의 군사적 우위로 이어졌다. 무엇을 얼마나 빨리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전쟁을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는지를 결정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더 복잡하다. 한 나라의 무기가 그 나라 안에서만 완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전투기 한 대에도 여러 국가에서 생산된 반도체와 센서, 희소금속, 소프트웨어가 들어간다. 위성통신 시스템은 민간 우주기업의 기술을 활용하고, 군용 드론에는 상업용 부품이 사용된다. 민간 산업과 국방산업, 국내 생산과 해외 공급망을 명확하게 나누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경제력과 안보를 연결할 때 흔히 떠올리는 공식은 단순하다. 부유한 국가는 많은 국방비를 지출할 수 있고, 많은 국방비는 강한 군사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요인이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국제무역과 국내 생산구조, 경제성장과 불황, 세금과 국채, 기업과 노동자, 천연자원과 글로벌 공급망이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전쟁과 평화에 영향을 미친다. 국가 간 전쟁뿐 아니라 테러리즘과 내전까지 포함하면 그 연결망은 더욱 복잡해진다.
중요한 대목은 경제가 언제나 평화를 만들거나 언제나 전쟁을 부른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같은 무역도 조건에 따라 평화의 접착제가 되거나 상대국을 압박하는 무기가 된다. 경제발전은 사회를 안정시키기도 하지만 약탈할 만한 자원과 장악할 만한 산업을 늘려 새로운 갈등을 낳기도 한다. 세계화는 국가들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동시에 한쪽이 다른 쪽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안보를 국내총생산이나 국방비라는 숫자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돈이 많더라도 그것을 군사적 역량으로 바꿀 산업 기반이 약할 수 있다.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핵심 원료를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다. 세계적인 기업이 많은 국가라도 기업의 이해관계가 정부의 전략과 일치한다는 보장은 없다. 안보의 실체를 보려면 ‘얼마나 부유한가’뿐 아니라 ‘무엇을 생산하고, 어떻게 연결돼 있으며, 누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가’를 함께 살펴야 한다.
무역이 평화를 지킨다는 오래된 믿음
두 나라가 서로 많은 물건을 사고판다면 전쟁을 벌이기 어려워진다는 생각은 직관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 공장에 필요한 부품이 끊기고 수출시장이 사라지며 금융거래와 운송이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교역 규모가 클수록 파괴해야 할 경제적 가치도 커진다. 무역은 국경을 넘는 상품뿐 아니라 전쟁을 피해야 할 이해관계까지 만들어낸다.
프랑스 경제학자 프레데리크 바스티아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격언에는 “상품이 국경을 넘지 않으면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는 취지의 문장이 있다. 정확한 출처를 둘러싼 논란과 별개로, 이 표현은 무역과 평화를 연결하는 자유주의적 믿음을 압축한다. 서로 장사하는 편이 싸우는 것보다 이익이라면 국가도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는 논리다.
유럽 통합은 이러한 생각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수차례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와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석탄과 철강은 단순한 산업 원료가 아니라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자원이었다. 두 나라가 핵심 자원의 생산과 유통을 함께 관리하면 한쪽이 몰래 군사력을 키우기 어려워진다. 경제협력이 우호의 표현에 머물지 않고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과 이익을 낮추는 제도로 설계된 것이다.
기업도 평화의 이해당사자가 된다. 해외에 공장을 세우고 현지 업체와 계약을 맺은 기업은 전쟁으로 공급망이 끊기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항공사와 해운사, 금융기관과 유통기업도 국경이 안정적으로 열려 있을 때 이익을 얻는다. 경제적 연결이 촘촘해질수록 전쟁에 반대하는 국내 집단이 늘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무역을 통해 상대국의 정보를 더 많이 얻는 효과도 있다. 기업과 금융기관, 정부 당국자가 반복적으로 교류하면 상대의 상황과 의도를 파악할 통로가 늘어난다. 오해와 과장된 두려움이 줄어들면 군사적 충돌을 피할 가능성도 커진다. 경제적 연결은 손실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대화의 창구와 예측 가능성까지 제공한다.
하지만 교역량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평화를 보장할 수는 없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 역시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이루고 있었다. 금융과 무역망이 대륙을 연결했지만 정치적 경쟁과 민족주의, 동맹구조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경제적 손실이 예상된다는 사실과 지도자가 실제로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여기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무역이 많으냐 적으냐보다 관계가 끊겼을 때 어느 쪽이 더 큰 피해를 입는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양쪽이 비슷한 수준으로 손해를 본다면 상호의존은 억제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반대로 한쪽은 거래처를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다른 쪽은 대안이 없다면 무역은 평등한 연결이 아니다. 한쪽이 상대의 목을 조를 수 있는 비대칭적 의존이 된다.
서로 의존할수록 더 위험해지는 순간
세계화 시대의 공급망은 거대한 고속도로처럼 보였다. 기업은 가장 효율적인 생산지를 선택하고 필요한 부품을 가장 저렴한 곳에서 조달했다. 재고를 최소화하는 적시생산 방식은 비용을 낮췄고, 소비자는 더 다양한 제품을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는 교차로뿐 아니라 병목구간도 있다. 반드시 지나야 하는 다리 하나가 막히면 전체 교통이 멈춘다.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스마트폰과 자동차부터 데이터센터, 통신장비, 첨단무기까지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는 전략산업을 찾기 어렵다. 설계, 제조장비, 소재, 생산, 조립이 여러 국가와 기업에 분산돼 있어 어느 한쪽도 모든 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어렵다. 이러한 분업은 효율을 높였지만 특정 기업과 지역에 대한 의존도 함께 키웠다. 반도체 공급이 흔들리면 자동차 공장이 멈추고, 인공지능 개발 일정이 늦어지며, 국방산업의 생산 계획도 차질을 빚는다.
첨단 반도체와 제조장비에 대한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 핵심 광물과 관련 기술을 전략적으로 관리하려는 중국의 움직임은 무역과 안보가 얼마나 긴밀하게 얽혔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의 경제제재가 주로 석유와 금융을 겨냥했다면 오늘날에는 고성능 칩과 제조장비, 소프트웨어와 기술인력까지 통제 대상이 된다. 공장과 연구소, 특허와 데이터가 새로운 지정학적 전선으로 등장한다.
에너지는 더 오래된 사례다. 유럽은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이용해 비교적 저렴한 에너지를 확보했고, 러시아는 유럽시장에서 막대한 수출수입을 얻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였지만 의존의 정도는 대칭적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공급이 흔들리자 유럽은 액화천연가스 수입 확대, 저장시설 확충, 공급처 다변화에 나서야 했다. 값싼 에너지라는 경제적 이익이 안보상의 취약성으로 재평가됐다.
식량도 예외가 아니다. 곡물 수입국에는 항구 하나와 해상운송로 하나가 국가의 안정과 직결될 수 있다. 흑해 지역의 전쟁으로 곡물 수출이 차질을 빚자 멀리 떨어진 국가의 밀가루와 식용유 가격까지 영향을 받았다. 식량 가격이 급등하면 가계 부담이 커지고,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며, 정치적 불안이 심해질 수 있다. 전선에서 일어난 충돌이 다른 대륙의 빵값을 거쳐 사회 갈등으로 번지는 것이다.
의약품 공급망도 같은 문제를 품고 있다. 완제품 제약회사가 자국에 있더라도 원료의약품을 소수 국가에서 조달한다면 생산기반이 완전히 국내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 감염병이나 분쟁으로 수출이 중단될 경우 병원과 약국의 재고는 빠르게 소진될 수 있다. 평상시에는 가장 저렴한 공급처를 선택했던 결정이 위기 때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보 문제로 바뀐다.
그렇다고 공급망을 무조건 짧게 만들거나 모든 생산을 국내로 돌리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 자급자족은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생산비를 높이고 혁신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해외 기업과 시장에서 완전히 분리되면 위기 때 활용할 대안도 줄어든다. 필요한 것은 단절보다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어느 품목이 반드시 필요한지, 대체 공급자가 있는지, 재고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특정 국가가 공급 중단을 위협할 때 감당할 비용이 어느 정도인지 살펴야 한다.
효율성만 묻던 공급망 관리에 복원력과 안보라는 질문이 추가된 이유다. 가장 싼 공급처가 가장 안전한 공급처는 아니다. 거래처가 많다는 사실도 안심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여러 공급업체가 같은 국가의 원료나 같은 항구,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에 의존한다면 장부에는 다변화로 보이지만 실제 구조는 하나의 병목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같은 경제가 평화도, 전쟁도 만드는 이유
경제와 안보의 관계를 둘러싼 가장 위험한 유혹은 간단한 법칙을 찾는 것이다. “무역이 늘면 전쟁이 줄어든다”, “가난하면 테러가 증가한다”,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지도자는 전쟁을 일으킨다”와 같은 문장은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세계정치는 짧은 공식에 좀처럼 들어맞지 않는다.
경제적 상호의존은 전쟁의 비용을 높이지만, 지도자가 미래의 교역이 곧 끊길 것이라고 예상하면 반대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불리해진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국이 핵심 자원을 통제하거나 경제성장 속도에서 앞서가기 시작하면 현재의 평화보다 미래의 열세를 더 두려워할 수 있다. 무역이 평화를 지키는 끈이었다가 시간 압박을 만드는 시계로 바뀌는 순간이다.
경제난과 군사행동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다. 정치 지도자가 국내 불만을 외부의 적에게 돌리기 위해 군사적 위기를 조성한다는 ‘주의 전환 전쟁’ 가설은 충분히 그럴듯하다. 실업이 늘고 지지율이 떨어지면 외부 위협을 강조해 국민을 결집하려는 유인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운 국가는 전쟁에 필요한 재원과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기도 힘들다. 경제난이 공격성을 높일 수 있는 동시에 군사행동에 나설 능력을 약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쟁비용을 누가 부담하는가도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전쟁비용을 세금으로 즉시 걷는다면 국민은 지갑을 통해 비용을 체감한다. 반면 국채 발행이나 통화 증발로 비용을 미래로 넘기면 당장의 부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가격표를 선명하게 보여주느냐 가려두느냐에 따라 대중의 지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세금과 평화’의 문제다. 전쟁은 군사적 결정이면서 비용을 어떻게 배분하고 인식시키는가에 관한 정치적 선택이 된다.
부유한 국가가 더 평화로운지도 조건을 따져야 한다. 경제발전은 교육과 행정역량을 높이고, 정부가 시민에게 공공서비스를 제공할 여력을 키운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미래에 대한 기대는 무장조직의 동원력을 낮출 수 있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이 언제나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석유나 다이아몬드처럼 쉽게 수출할 수 있는 자원이 특정 지역에 집중돼 있다면 이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내전을 격화할 수 있다. 자원이 국가 전체의 번영보다 무장세력의 자금줄이 되는 경우다.
테러리즘도 가난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빈곤은 불만과 취약성을 키울 수 있지만 테러를 계획하고 조직하며 국경을 넘어 실행하려면 자금과 교육, 통신망과 이동능력이 필요하다. 경제발전과 세계화가 불만을 줄이는 동시에 공격을 실행할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다. 국내 테러와 초국경 테러를 구분하고, 경제성장률과 소득 수준, 세계경제와의 연결 정도를 따로 살펴야 하는 까닭이다.
경제 요인이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16가지 경로를 나누어 살피는 목적도 하나의 거대한 정답을 얻는 데 있지 않다. 경제적 원인이 어떤 중간 단계를 거쳐 안보의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분해하는 데 있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검은 상자를 열어보면 무역량뿐 아니라 의존의 방향, 경제주체의 이해관계, 비용 부담 방식, 생산구조와 정치제도가 나타난다. 경제는 전쟁을 자동으로 멈추거나 시작하는 스위치가 아니다. 여러 조건과 행위자를 거치며 방향이 달라지는 복잡한 전달장치에 가깝다.
국가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하나의 사람처럼 표현하는 문장은 국제정치를 설명할 때 편리하다. “미국은 원한다”, “중국은 두려워한다”, “유럽은 선택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실제 국가 안에는 서로 다른 계산을 하는 정부 부처와 기업, 노동조합, 소비자와 지역사회가 존재한다. 같은 정책을 놓고 누군가는 이익을 얻고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는다.
수입관세를 올리면 보호받는 산업의 기업과 노동자는 반길 수 있다. 하지만 수입 부품을 사용하는 제조업체는 비용 상승을 걱정한다. 첨단기술 수출을 제한하면 안보 당국은 전략기술의 유출을 막았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기업은 해외 매출 감소와 연구개발 투자 축소를 우려한다. 특정 국가에서 공장을 철수하면 공급망 위험은 낮아질 수 있어도 생산비가 오르고 소비자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 ‘국가안보를 위한 정책’ 안에서도 부담과 편익은 고르게 나뉘지 않는다.
대중국 반도체 통제는 이러한 충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미국 정부는 첨단기술이 경쟁국의 군사·정보 역량을 강화하는 일을 막으려 한다. 반도체와 장비 기업은 정책 취지에 협조하면서도 거대한 시장을 잃을 가능성을 계산한다. 통제가 너무 좁으면 효과가 약하고, 너무 넓으면 자국 기업의 매출과 혁신 능력까지 훼손할 수 있다. 안보와 경제 사이에는 깔끔한 경계선보다 계속 움직이는 협상선이 놓여 있다.
기업이 언제나 평화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국제시장에서 이익을 얻는 수출기업은 갈등 완화를 원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보호무역이나 국방지출 확대에서 이익을 얻는 산업은 강경정책을 선호할 수 있다. 해외 경쟁자의 퇴출이 시장점유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기업도 있다. ‘비즈니스는 평화를 좋아한다’는 말은 기업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을 때만 성립한다. 실제로는 산업과 시장,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선호가 갈라진다.
시민 역시 전쟁의 비용을 동일하게 느끼지 않는다. 세금을 더 내는 사람, 징집 대상이 되는 가족, 군수공장이 있는 지역, 에너지 가격 상승을 감당해야 하는 가계의 판단은 다를 수 있다. 전쟁이나 제재의 총비용만 계산해서는 정책 지지의 방향을 알기 어렵다. 누가 비용을 내고, 누가 보상을 받으며, 부담이 언제 눈앞에 나타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이러한 관점은 기업 경영에도 중요하다. 지정학적 위험은 국가 간 사건이 발생한 뒤 대응하는 외부 충격에만 머물지 않는다. 로비와 투자, 생산지 선택, 기술 이전, 데이터 보관 같은 기업의 결정도 국가의 안보정책을 형성한다. 공급망의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에 따라 기업은 정책의 피해자도, 수혜자도, 때로는 설계에 영향을 미치는 참여자도 될 수 있다.
애덤 스미스로 다시 읽는 국가안보
애덤 스미스를 자유시장과 작은 정부의 상징으로만 기억하면 그의 문제의식 가운데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스미스는 생산과 분업, 시장의 확대가 사회의 부를 어떻게 바꾸는지 분석하는 동시에 국방과 공공재, 국가의 역할도 고민했다. 상업사회가 부를 늘릴 수 있지만 그 부를 지키는 데 필요한 제도와 역량까지 함께 따졌다.
경제와 안보를 해석할 때는 세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경제적 목표와 안보 목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수많은 경제 요인 가운데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기업을 비롯한 경제주체는 안보정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첫 번째 질문은 ‘대포와 버터’라는 오래된 선택으로 이어진다. 국방비를 늘리면 복지와 교육, 기반시설에 쓸 돈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국방비가 언제나 경제적 희생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군사 연구개발이 민간기술로 확산되고, 안정적인 안보환경이 투자와 교역을 촉진할 수도 있다. 반대로 경제성장만 추구하다 핵심 산업과 자원에 대한 취약성을 키우면 미래의 안보비용이 더 커질 수 있다. 경제와 안보는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이 사라지는 고정된 저울이 아니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균형점이 계속 달라진다.
두 번째 질문은 국내외 경제구조를 보게 한다. 국내총생산이나 무역액 같은 총량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가 주로 무엇을 생산하는지, 기술과 자본이 어느 산업에 모이는지, 핵심 부품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지, 공급망의 병목을 누가 통제하는지 살펴야 한다. 공장을 점령한다고 해서 특허와 데이터, 숙련된 기술자와 세계적인 협력망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집약적 경제에서는 영토 정복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과거보다 줄어들 수 있다.
세 번째 질문은 정부를 사회와 분리된 단일 행위자로 보지 않게 한다. 정책 결정자는 기업과 노동자, 유권자와 관료조직의 압력을 받는다. 동시에 정부도 독자적인 안보 목표와 정보를 갖는다. 현실주의가 국가의 자율성과 권력경쟁을 강조한다면 자유주의 정치경제는 사회집단의 이해관계와 제도의 역할을 더 주목한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버리기보다 어떤 상황에서 국가가 주도하고, 어떤 상황에서 경제주체의 압력이 강해지는지 구분해야 한다.
이 세 질문은 경제가 평화를 만든다는 낙관론과 경제가 권력투쟁의 도구일 뿐이라는 비관론 사이에 통로를 낸다. 자유무역 역시 선하거나 악한 제도로만 규정할 수 없다. 시장의 연결 방식과 참여자의 힘, 대체 가능성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필요한 것은 찬반의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경로에 대한 분석이다.
공급망 시대, 기업도 안보의 당사자다
한때 기업의 공급망 회의에서는 가격, 품질, 납기 세 가지가 핵심 질문이었다. 이제는 다른 질문이 줄줄이 붙는다. 생산국이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은 없는가. 항로가 봉쇄되면 대체 운송수단이 있는가. 사용 중인 클라우드와 통신망은 어느 국가의 법률을 적용받는가. 부품 안에 수출통제 기술이 포함돼 있는가. 협력업체의 협력업체는 어디에서 원료를 조달하는가.
지도 위에 공장 위치를 표시하는 것만으로는 위험을 찾기 어렵다. 한국 기업이 베트남 공장에서 제품을 조립하더라도 핵심 소재는 중국에서, 제조장비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설계 소프트웨어는 미국에서 공급받을 수 있다. 완제품의 생산국과 실제 의존구조가 다른 것이다. ‘어디에서 만들었는가’보다 ‘무엇이 멈추면 전체 생산이 멈추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에 따라 재고를 낭비로만 보던 시각도 달라진다. 평상시에는 최소 재고가 자본 효율성을 높이지만 위기 때는 며칠분의 재고가 기업의 생존 시간을 결정한다. 공급업체를 추가하는 데 비용이 들더라도 단일 실패 지점을 줄일 수 있다면 일종의 보험료로 해석할 수 있다. 생산거점을 자국이나 우호국으로 옮기는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도 단순한 애국적 구호가 아니라 비용과 위험을 다시 계산하려는 시도다.
그렇다고 모든 공급망을 안보 논리로 재편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생산비 상승은 소비자 가격에 반영되고, 시장 분할은 기업의 규모의 경제를 약화한다. 연구개발에 투입할 수익이 줄어 장기적인 기술경쟁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동맹국 중심의 공급망도 모든 정치적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다. 경제안보를 강화하려다 경제 기반 자체를 약하게 만드는 역설을 피해야 한다.
경영자에게 필요한 것은 지정학적 예언이 아니다. 다음 분쟁이 어느 지역에서 언제 발생할지 정확히 맞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충격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서 손실이 증폭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특정 국가의 수출규제가 매출과 생산에 미칠 영향, 핵심 부품의 대체 기간, 주요 고객의 제재 노출도, 기술과 데이터가 이동할 때 적용되는 규정을 미리 점검할 수 있다.
국가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자국 생산을 무조건 늘리기보다 반드시 지켜야 할 산업과 시장에 맡겨도 되는 산업을 구분해야 한다. 동맹을 군사협력만이 아니라 기술표준과 공동투자, 비축과 공급망 협력으로 확장할 필요도 있다. 경제적 연결을 모두 위험으로 간주하면 고립의 비용이 커지고, 모든 연결을 선의로만 해석하면 압박에 취약해진다.
국경을 넘는 컨테이너선은 평화의 증거인 동시에 잠재적인 압박 수단이다. 반도체 공장은 성장산업이면서 전략자산이고, 기업의 구매계약은 비용 절감 수단이면서 국가 간 의존을 설계하는 행위가 된다. 경제와 안보 사이에 선을 긋는 대신 둘이 만나는 경로를 하나씩 추적해야 하는 이유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경제의 바깥에서 침입하지 않는다. 평상시에 선택한 생산방식과 거래관계, 세금과 투자, 기술정책 속에서 전쟁을 억제하거나 부추길 조건이 조금씩 만들어진다. 총성이 들리기 전부터 공장과 항구, 연구소와 이사회에서 안보의 방향이 결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