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현자들의 죽음

저   자
고미숙 (지은이)
출판사
EBS BOOKS
출판일
2023년 12월







  • 인류 지성사의 모든 영역,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과 예술 등은 죽음을 이해하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죽음은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분리될 수 없는 법입니다. 죽음을 주제로, 8인의 현자들과 만나보세요.



    현자들의 죽음


    소크라테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죽음에 대한 변론 2 _ 삶과 죽음은 순환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달인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하고든 대화한다. 그에게 걸려들면 결국 자신의 무지를 선언할 수밖에 없다. 무지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리로 나아가는 문이다. 자신이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다시 말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이 참으로 피상적이며 덧없음을 알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는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사유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자신이 그러했다. ‘그는 혼자 떨어져서, 어디든 간에 그냥 서서 생각을 한다.’ 전쟁에 참전했을 때에도, 파티하러 가던 도중 담벼락 아래에서도, 마치 화두를 들고 삼매에 들어가는 선승들처럼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 사유의 주제 안에 죽음이 있었으리란 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이제 감옥에서 그것을 펼칠 차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지혜를 전달할 최고의 현장이 아닌가. 그는 말한다. “배심원들 앞에서보다 더 공들여서 나 자신을 변론하고 자네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변론의 요지는 ‘삶과 죽음은 순환한다’는 것.


    “옛날부터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죽은 사람의 영혼은 이승을 떠나 저승에 있다가 이승으로 돌아와 다시 태어난다고 하네.”


    인도 문명권의 윤회론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논리에 뼈와 살을 부여하여 보편적 이치로 변주해 낸다. 그에 따르면 삶과 죽음은 대립물이다. 그런데 “모든 한 쌍의 대립물 사이에는 상호적이고 이중적인 생성 과정”이 있다. 즉 “대립물 중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가 생겨나고, 그렇게 생겨난 것은 자신의 대립물인 다른 하나로 되돌아”간다. 부연하면, “모든 대립물이 자신의 대립물을 생성하고, 그렇게 생성된 대립물이 다시 자신의 대립물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쌍방향으로 진행되어서, 그러한 이중적인 생성 과정이 하나의 원처럼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중화 문명권의 음양오행, 상생상극의 이치를 연상시키는 논리다. 대립물의 쌍방향적 진행이 직선이 아닌 원처럼 순환한다고 보는 것도 흥미롭다.


    만약 반대로 대립물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진행된다면 어떻게 될까?


    “대립물 중 오직 특정한 하나가 다른 특정한 하나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고 반대 방향으로는 진행되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세. 그런 경우에는 결국에는 대립물이라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것이 하나의 똑같은 형태와 하나의 똑같은 상태가 되어서 생성 자체가 멈추게 될 것임을 자네는 아는가?”


    삶과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고, 죽은 후에는 그 죽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없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은 죽어 있고,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때가 필연적으로 오지 않겠는가?”


    즉 그렇게 되면 우주의 모든 활동은 종국에는 멈추게 되고 만다. 결국 우주가 존재하려면, 그리고 생명이 계속 활동하려면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의 이행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다. ‘없다’는 표현이 좀 과격하다면 매우 ‘희미해진다’ 정도로 해 두자. 생사를 이원론적으로 날카롭게 구획하는 관점에서 상당히 멀어진 셈이다. 죽음이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일 수도 있다고 한 그의 진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인도의 윤회론, 중국의 오행론을 연상시키는 이런 관점이 지중해 문명과 동방 문명과의 교류로 인한 것인지는 확인할 바가 없다. 분명한 건 당시 소크라테스뿐 아니라 피타고라스(Pythagoras), 플라톤(Platon) 등 지중해의 현자들 사이에선 이런 논리가 상당히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변론 3 _ 영혼은 불멸한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안다. 죽으면 육체는 소멸되어 산산이 흩어진다는 것을. 한데 어떻게 돌아온다는 것인가?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히 영혼이다.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다. 정말 그런가?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확신한다. “살아 있는 자들이 죽어 있는 자들에게서 생겨난다”면, 육체는 소멸될지언정 영혼은 지속된다는 것. 그래야만 삶과 죽음이 계속 순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 윤회론의 핵심은 ‘영혼불멸설’이다.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에 따르면, “프시케(psyche), 즉 영혼의 발견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을 만하다.” 미케네 문명의 영웅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고전 ‘일리아드(liad)’와 ‘오디세이(Odyssey)’가 잘 보여 주듯이, 그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다 특정한 신들의 활약이라 여겼다. 사랑에 빠지는 건 큐피드(Cupid)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고, 폭풍 같은 분노에 휩싸이는 건 포세이돈(Poseidon)의 왕림 때문이고, 광기에 사로잡히는 건 디오니소스(Dionysos)가 덮쳤기 때문이고 등. 그러니 인간은 내면을 돌보고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영혼의 발견과 더불어 마음의 모든 활동과 변화를 신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면 프시케, 즉 영혼이란 무엇일까? 진정한 자아, 순수의식, 혹은 아트만 등이 연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파니샤드 철학의 핵심인 아트만이 몸, 숨, 열기 등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면, 소크라테스의 영혼은 철저히 몸과 분리된 것이다. 그래야 모든 정신 활동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프시케는 개인의 탄생 이전부터 존재하며,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다. 영혼 덕분에 인간은 추론할 수 있고, 선을 찾을 수 있다. 영혼의 계발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소크라테스의 ‘상기론’이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상기론에 따르면, “배운다는 것은 기억해 내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영혼은 ‘수많은 전생’을 통해 이미 모든 원형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태어나면서 잊어버렸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새로운 것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것일 뿐이다.


    이렇듯, 영혼불멸설은 영혼/육체의 이원론을 전제로 한다. 즉 영혼과 육체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둘은 구성과 작용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먼저 영혼은 순수하고 투명하고 단일하며 해체될 수 없다. 하여 영원하다. 반면 육체는 무겁고 탁하고 잡스럽다.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합성물이기 때문에 언제든 해체할 수 있다. 당연히 무상하고 유한하다. 산다는 건 영혼과 몸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의 법칙은 영혼이 주인이 되어 몸을 지배하라고 명령한다. 그 명령에 부응하다가 죽으면 영혼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몸에 속한 그 어떤 것도 동반하지 않은 채 홀로 순수한 상태로 있게 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한 번의 생으로 충분하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_ 에딩턴과 스피노자, 그리고 간디

    대개의 과학자는 과학과 정치, 과학과 종교를 분리한다. 그러면서도 전쟁이 일어나면 즉각 민족주의, 애국주의의 열광에 빠져 자신의 전문성을 살상 무기를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다른 한편, 과학적 진실이 새로운 세계와 우주를 발견해 내도 정작 자신의 세계관에는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는다. 왜? 질문 자체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진리와 인생관은 별개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인슈타인은 정말 달랐다. 청소년기부터 이미 제식훈련, 군국주의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이후 그의 정치사상은 자유주의, 세계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등으로 발전해 간다. 자본주의의 사치와 방탕에 대해서 경멸을 아끼지 않는 한편,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체제에도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했지만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에는 회의적이었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 등 ‘마이너’들에 대한 지지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바야흐로 양자 역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양자 역학의 원리가 기술 문명의 원천이 된 지금, 과연 양자 역학자들이 삶과 세계에 대한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신의 자리에 과학이 들어선 지 오래지만, 과학은 여전히 기술지(knowledge by description)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 미국 여행 중 칼텍(Caltech)의 학생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과학은 사람들에게 서로를 죽이고 불구로 만드는 무기를 제공하기 바쁘고, 평화 시에는 사람들의 생활을 더더욱 분주하게 만들었다. 과학은 해방의 동력이 되기는커녕 장시간 지루하게 일하도록 함으로써 결국 사람을 기계의 노예로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보통 사람들을 더 잘 살게 만드는 것에 관한 관심이 주된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한다. ‘도형과 방정식을 풀 때 그 사실을 꼭 명심해라!’


    그럼 그는 어떻게 이런 세계관을 지니게 되었을까? 무엇보다 그는 철학하기를 멈춘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순수이성비판’을 독파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데이비드 흄(David Hume) 등을 섭렵했다. 철학은 그저 교양이나 취미가 아니었다. 모든 철학이 그의 사고실험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에티카(Ethica)’ 였다. 아인슈타인과 스피노자의 마주침도 참 흥미로운 사건이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도 유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의 유일신인 인격신을 거부하는 바람에 유대 공동체에서 추방되었고, 이후 렌즈 세공을 하면서 거리의 철학자가 되었다. ‘에티카’는 그의 대표작으로 서양 철학사의 한 장을 차지한다. 이 책은 스타일 자체가 파격이다. 책 전체가 명제와 정리, 정의 등 기하학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철학책을 이렇게 쓸 수도 있나 싶은 충격을 안겨 준다. 신에 대한 정리를 통해 신과 자연, 신과 만물, 그리고 인식의 세 단계인 일종/이종/삼종을 거쳐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형식이다.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깊이 공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스피노자의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서의 신’이었다.


    간디의 영적 원천인 ‘바가바드기타’의 신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아인슈타인은 간디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간디가 진리와 정치는 절대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듯이, 아인슈타인도 그랬다. “종교 없는 과학은 똑바로 걸을 수 없고, 과학 없는 종교는 눈이 먼 것이다.”



    연암 박지원: 죽음은 도처에 있다

    죽음에 대한 단상 2 _ 삶은 요행이다

    권력의 장에서 벗어나면 우정의 지평이 열린다. 삶의 방향이 위계적 서열이 아닌 수평적 공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우정은 지성을 부르고, 우정과 지성의 향연은 문장을 빛나게 한다.


    먼저 우정에 대하여. 연암은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타고난 본성이었다. 거기에 더해 후천적으로도 그 의미를 강렬하게 체험한 바 있다. 바로 십 대 후반에 겪은 우울증이다. 먹을 수도, 잠들 수도 없는 그때 연암을 살린 것은 사람들과의 교류였다. 분뇨 장수 노인을 만나고, 이야기에 빠진 민옹을 만나고, 거리의 어깨들을 만나고, 신선술 닦는 도인을 만나고... 우울증이란 무엇인가? 생에 대한 의욕이 가라앉으면서 죽음 충동에 휩싸이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존재와 삶의 무의미성! 거기에 사로잡히면 혀에 단맛이 사라진다. 모든 음식이 쓰고 무미건조하다. 동시에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허무하고 막막하고 불안하고, 잠 못 이루는 밤은 삶의 의지를 더욱 떨어뜨린다.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려면? 일단 살맛을 복원해야 한다. 어떻게? 사람과 사람이 마주치면 된다. 마주침이 일어나면 기운이 오고 간다. 흔히 소통 혹은 교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연암은 그때 사무치게 깨달았다. 거리에서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인생을 음미하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럴 때 살맛이 회복된다는 것을. 나아가 타자들과의 마주침, 즉 우정과 교감이야말로 생의 원동력임을 알게 된 것이다.


    다음, 글쓰기에 대하여. 그는 평생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글쓰기가 수양이자 수행이었다. 가장 좋아한 것도 글쓰기였고, 가장 열렬히 추구한 것도 글쓰기였다. 그렇다면 지성을 연마하고 글쓰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벗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삶이다. 연암은 평생 그런 삶을 추구했으며 또 그렇게 살았다.


    그런 그에게 벗들의 죽음이 닥쳐온다. 가장 충격적인 것이 바로 이희천의 죽음이었다. 이희천은 연암이 모시던 스승의 아들이자 청년기를 함께 보낸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 그가 효수형에 처해진 것이다. 당쟁에 얽힌 것도, 역모에 얽힌 것도 아닌데 목을 잘라 거리에 매다는 효수형이라니! 금서를 소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청나라에서 수입한 책 가운데 ‘명기집략’이라는 저서가 있었다. 여기에 태조 이성계의 출생에 대한 ‘악성 루머’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영조가 느닷없이 그 책과 관련된 또 다른 저서 ‘강감회찬’에 대한 불심검문, 압수 수색을 감행한 것이다. 이희천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책을 그저 소장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정치적 광풍에 휩쓸린 이희천은 영문도 모른 채 본보기로 희생양이 되었다. 서른넷의 나이였다. 게다가 이 책에 대한 상소를 올린 이가 연암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이었다. 더 어이없게도 그 책은 연암의 삼종형 박명원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하지만 박명원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다. 왜? 박명원은 명문거족이었으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슬픔은 슬픔을 몰고 온다고, 이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또 하나의 죽음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제자뻘 되는 청년 이몽직의 죽음이 그것이다. 이몽직은 충무공의 후손으로 무인이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남산 활터에서 활쏘기를 하다가 빗나간 화살에 얼굴을 다쳤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이희천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희천은 정치적 희생양이라 쳐도 이몽직의 죽음은 대체 뭐지? 세상과 담을 쌓는다고 해소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젠 죽음을 맞대면하기로 한다. 죽음에 관한 본격적 탐구를 시작한 것이다.


    “대저 사람의 삶은 요행이라 할 수 있는데도 그 죽음이 공교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루 동안에도 죽을 뻔한 위험에 부딪치고 환난을 범하는 것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다만 그것이 간발의 차이로 갑자기 스쳐 가고 짧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데다가, 마침 민첩한 귀와 눈, 막아 주는 손과 발이 있어서 스스로 그렇게 되는 까닭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사람들도 편안하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행동하여 밤새 무슨 변고가 없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이몽직에 대한 애사’)


    그렇다. 우리는 느닷없는 죽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이치를 따지고 보면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게 더 타당하다. 다시 말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게 더 신기한 노릇이란 뜻이다. 하루에도 죽을 뻔한 위기가 수두룩하고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엇갈리는 일이 태반이다. 그걸 일일이 경계하고 고민한다면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냥 귀와 눈, 손발이 무의식적으로 지켜 주려니 하고 믿을 뿐이다. 만약 이런 사고를 일일이 경계하고 조심한다면 날마다 근심 걱정으로 지샐 수밖에 없다. 설령 그런다고 해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환란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생각을 바꿔 먹어야 한다. 죽음은 도처에 있고,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건 요행이다. 그것이 연암이 터득한 생사의 이치다.


    죽음에 대한 단상 3 _ 모든 인연은 악연이다

    죽음은 느닷없고 삶은 요행이다. 이것이 생사의 이치임은 알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서럽고 애통하고 허망한 건 어찌할 수 없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는 어쩌다 이생에서 이런 인연으로 마주쳤을까.


    “대개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는 이것이 원업이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이 이희천처럼 참혹하고 몽직처럼 공교로운 경우에는, 평생 서로 즐거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고통이 혹독하여 뼈를 찔러 대니, 이것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쳐져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만약에 몽직과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몽직에 대한 애사’)


    생각이 인연으로, 인연이 다시 사귐으로, 사람은 정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정이다. 정이 들면 원업이 된다. 서로 즐거워한 시간은 실로 짧은데 사별의 고통이 이토록 뼈에 사무치니 이보다 더한 원수가 어디 있으랴. 그렇구나, 문제는 그놈의 정이로구나! 아니다. 정이 든 건 인연을 맺은 탓이니 결국 인연이 웬수로구나! 하지만 산다는 건 인연을 맺는 것이 아니던가. 그럼 인연을 맺어 정이 들면 결국엔 다 이렇게 깊은 슬픔을 낳는다는 뜻인가? 그렇다. 고로 모든 인연은 다 악연이다! 반어법처럼 들리지만 직설법이다. 정을 주고받으며 사는 한 결국은 별리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어쩔 도리는 없다. 다만 알면 된다.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기쁨은 슬픔을 불러오고, 삶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이치를. 알면 뭐가 달라지는가? 적어도 원업이 되지는 않는다. 기쁠 때는 기쁨이 되고, 슬플 때는 슬픔이 될 뿐! 그러면 죽음과 마주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그동안 살아 있어 서 참 좋았다고.


    연암은 묻는다.


    “죽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과, 산 사람이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함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슬플까?” (‘유경집에 대한 애사’)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한 말이다. 죽은 자가 슬픈가? 아니면 살아서 그 죽음을 애통해하는 자가 슬픈가? 누구는 죽은 사람이 더 슬프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산 사람이 더 슬프다고 한다. 또 누군가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슬픔은 함께 논할 수가 없다’고 한다. 연암은 말한다. 단연코 ‘산 사람이 더 슬프다’고.


    연암이 생각하기에 이런 죽음은 일종의 ‘배신’이다. 이렇게 큰 사랑을 주고는 훌쩍 떠나가다니, 어떤 사기꾼이나 배신자도 이보다 더한 고통을 주지는 않는다. 이런 인연이야말로 악연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지만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이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인연이 깊을수록 악연이 되는 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다. 그 숙명을 감당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이치를 통렬히 ‘아는’ 것이다. 알면 뭐 어떻게 되느냐고? 조금은 달라진다. 이렇게 되물어 보자. 함께하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설령 처음부터 알았다고 한들 인연을 포기하진 않았으리라. 그렇다. 별리의 슬픔이 아무리 크기로서니 만남의 기쁨을 상쇄하진 못한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 청년의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아내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비록 짧았지만 참 좋은 만남이었구나! 다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이제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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