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대의 영화학』은 남북한 영화 속에 담긴 이념과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한반도 현대사를 다시 읽어내는 깊이 있는 연구서이다. 전쟁·냉전·탈냉전의 시대를 거치며 영화가 어떻게 국가의 이념을 정당화하고 개인의 삶을 재현했는지를 섬세하게 분석한다.

남한의 반공영화부터 북한의 혁명서사, 탈북자의 디아스포라 영화까지, 스크린 위의 분단은 우리 시대의 거울이 된다. 정영권은 정치적 선전 뒤에 숨은 예술의 미학과 인간의 윤리를 포착하며, 영화가 만들어낸 ‘기억의 지도’를 새롭게 그린다.

분단을 넘어 인간을 이해하려는 모든 독자에게 사유의 확장을 선사한다.

■ 저자 정영권

비디오도 없던 시절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들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사랑을 키운 이래, 중고등학교 때 〈택시 드라이버〉, 〈지옥의 묵시록〉 등 난해한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니면서 영화광이란 필시 고독한 존재임을 실존적으로 깨달았다. 학부에서는 불문학을 전공했으나 전공보다는 영화 비평과 이론 공부로 한눈팔았고, 동국대 대학원 영화영상학과에 진학하여 영화이론에 정식 입문했다. 석사과정 시절 시네필 특유의 유아독존적 오만함으로 앙드레 바쟁, 루돌프 아른하임 등의 순수 영화이론과 예술영화에 심취했지만, 로빈 우드의 영화 이데올로기 이론, 스티브 닐과 릭 알트먼의 영화장르 이론이 너무 재미있어 영화사회학과 장르영화로 눈을 돌렸다. 이때 미학·철학보다는 정치사회학·문화정치학이 더 맞는 옷임을 직감했다.

한국 반공영화의 제도화·장르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접근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자연스럽게 반공·분단·(탈)냉전·북한영화로 연구영역을 확장해 이와 관련한 적지 않은 논문들을 썼다. 현재는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하며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의 영화장르를 정치·사회·문화사적 관점으로 진단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영화학회 학술이사를 거쳐 현재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동국대·한국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적대와 동원의 문화정치: 한국 반공영화의 제도화 1949~1968』, 『영화 이론 입문: 포토제니론에서 디지털 이론까지』, 『영화 장르의 이해』, 공저로 『지향과 현실: 남북문화예술의 접점』, 『세대와 젠더: 동시대 북한문예의 감성』, 『속도의 풍경: 천리마시대 북한 문예의 감수성』, 『해방과 전쟁 사이의 한국영화』, 『영화는 역사가 아니다: 한국 현대사 영화는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았나』 등이 있다.

책머리에

제1부 한국전쟁과 기억, 민족, 젠더

1장 전쟁과 기억: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할매꽃〉(2007)

2장 전쟁과 민족: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월미도〉(1982)

3장 전쟁과 여성: 〈이 생명 다하도록〉(1960), 〈귀로〉(1967)

4장 전쟁과 남성: 〈포화 속으로〉(2010), 〈고지전〉(2011)

제2부 냉전시대 남북한 영화의 정치학

5장 1960년대 남한의 간첩영화와 반공병영국가의 형성

6장 1960년대 북한의 ‘남조선혁명’: 〈성장의 길에서〉(1964~1965)

제3부 탈냉전시대 북한영화의 젠더와 세대

7장 북한의 여성과 가부장적 온정주의: 〈복무의 길〉(2001)

8장 북한의 청년세대: 〈흰 연기〉(2000), 〈청춘의 자서전〉(2001), 〈세대의 임무〉(2002), 〈청년들을 자랑하라〉(2003)

제4부 탈냉전시대 남한영화와 (탈)북한 디아스포라

9장 ‘세계인’의 균열과 북한이라는 ‘얼룩’: 〈역도산〉(2004)

10장 탈북자의 장소상실과 정체성: 〈처음 만난 사람들〉(2007), 〈무산일기〉(2010)

제5부 ‘주체혁명’(1967) 이전 북한의 외국영화 수용

11장 북한 초기(1945~1953) 소련영화 수용과 영향

12장 ‘주체혁명’(1967) 직전 북한의 세계영화사 인식

참고문헌

최초 게재 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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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그가 속한 세계의 구조를 함께 응시하는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현실을 재구성하는 언어였다. 『분단시대의 영화학』은 남북한 영화 속에서 교차한 이념과 인간의 서사를 해부하며, 스크린이 어떻게 정치와 감정의 전장이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남한과 북한의 스크린은 서로 다른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심층에는 공통된 기억 — 전쟁, 상실, 이데올로기 — 이 흐르고 있다. 그 기억의 흔적을 좇으며, 영화라는 예술이 어떻게 국가의 기억을 만들고 또 왜곡해왔는지를 살펴 보자.

한반도의 영화사는 곧 전쟁의 역사다. 남북한의 스크린은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전시하는 무대였고, 그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반복되었다.

“1980년대까지 남한영화에서 전쟁영화라는 장르는 반공영화라는 ‘상위 장르’에 포함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남한 영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반공’이라는 절대적 틀에 갇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총성이 멈춘 이후에도 영화 속에서는 여전히 적과 동지가 대립했고, 인간의 고통은 국가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소재로 변했다.

영화는 기억을 보존하는 예술인 동시에 망각을 설계하는 매체다. 전쟁영화의 반복된 서사는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도록 길들였다. 그러나 정영권의 분석은 이 단순한 구도를 넘어, 각 영화가 만들어내는 서사 구조 속에서 국가가 어떻게 감정을 통제하고, 개인이 어떻게 기억을 재구성하는가를 탐색한다. 전쟁의 재현은 결국 한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한편 전쟁의 영화적 언어는 남성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영웅, 전우, 전사, 희생 — 이 모든 키워드는 남성적 규율의 세계에서 파생되었다.

“전쟁영화 속 남성을 국가/민족의 대변자로 상정하고 소외된 타자로서 여성을 다루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전쟁영화라는 장르의 틀 속에서 구체적으로 재현된 남성성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는 거의 없다.”

이 분석은 단순히 젠더 문제를 넘어서, 국가의 서사적 구조 자체가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여성은 종종 전쟁의 배경으로 존재한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내, 혹은 희생된 이로만 등장한다. 그러나 그 부재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여성의 침묵은 전쟁의 폭력성과 국가의 지배 구조를 은유한다. 이 책은 이러한 ‘침묵의 서사’를 읽어내며, 남성 중심의 전쟁영화가 국가의 이념을 미학적으로 재생산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분석한다.

결국 남성성의 신화는 국가가 만든 허구이며, 그 신화가 해체되는 지점에서 비로소 인간의 서사가 시작된다.

냉전은 단지 정치의 구도가 아니라, 예술의 언어를 규정한 시대였다. 남한의 영화가 반공의 신화를 전파했다면, 북한의 영화는 혁명의 신화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 대립의 구조 속에서도 양국의 영화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둘 다 국가를 위해 예술이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북한영화가 당 정책의 반영이라는 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북한영화의 미학적 형식을 논하는 것을 도외시하는 데 대한 정당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정영권은 이 대목에서 중요한 지점을 짚는다.

아무리 강력한 이념의 통제가 있어도, 영화는 여전히 예술이다. 감정, 리듬, 미장센, 그리고 배우의 표정 속에는 체제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인간적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

그는 북한영화의 미학적 형식을 통해 ‘당의 선전물’이라는 틀을 넘어, 억압된 예술의 잔존성을 포착한다. 이것은 결국 예술의 생명력에 대한 신념이자, 분단체제 속에서도 인간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증거다.

공간은 단지 물리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 축적되고 감정이 깃드는 장소로 변화한다.

“공간이 완전하게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 공간은 장소가 되며, 낯설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추상적 공간’은 의미로 가득한 ‘구체적 장소’가 된다.”

영화 속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의 장소(memoryscape) 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정영권은 ‘공간과 장소’의 구분을 통해 분단의 지리학을 새롭게 읽어낸다. 국경선, 비무장지대, 피난민 마을, 남북한 도시의 풍경은 각각의 영화에서 다르게 재현되지만, 그 안에는 공통의 정서 — 낯섦, 그리움, 상실 — 이 깃들어 있다. 스크린 속 장소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념이 현실을 점유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무대다.

영화는 공간을 인물의 심리와 사회의 기억으로 전환하며, 관객에게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분단 이후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균열은 물리적 경계가 아니라, 마음의 거리였다. 탈북자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이주의 기록이 아니라,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이다.

“우리가 탈북자 소재 영화 속에서 진정으로 인간적인 남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 안의 타자’를 걷어내고, 그 공간에 ‘환대의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영화는 단순한 재현의 수단이 아니라, 윤리적 상상력의 장(場) 이 되어야 한다.

정영권은 남한 영화 속 탈북자 서사를 통해, 국가의 경계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묻는다. 남한 사회는 ‘환영’과 ‘불안’이라는 모순된 감정으로 타자를 대하며, 그 시선은 영화의 프레임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탈북자 서사를 새로운 가능성의 장소로 본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순간, 영화는 분단의 현실을 넘어 연결의 예술로 거듭난다.

기억과 이념, 예술과 정치가 교차하는 복합적 지형도가 바로 영화다. 남북한 영화는 서로를 비추며, 동시에 자신을 드러낸다. 정영권은 이 상호반영의 구조 속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이념의 언어로 번역되어왔는지를 탐색한다.

스크린은 때로 잔혹하고, 때로 따뜻하다. 그 위에는 전쟁의 고통과 분단의 상처,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침묵이 겹겹이 쌓여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층위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말한다. 영화는 국가의 기억을 기록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에 균열을 낸다. 바로 그 틈새에서 우리는 ‘예술로서의 영화’가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목격한다. 그것은 이념의 세계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기록이다.

영화는 분단의 거울이자, 그 거울을 넘어서는 상상력이다. 스크린은 경계의 선이 아니라, 인간을 잇는 통로이다.

『분단시대의 영화학』은 정치와 예술, 이념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탁월한 비평서다. 남북한의 영화가 어떻게 시대의 초상을 비추어왔는지를 탐색하며, 그 속에서 ‘국가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교차하는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학적 깊이와 영화적 감성이 공존하는 이 책은, 분단의 현실을 문화의 언어로 사유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새로운 시야를 선사한다.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 — “국경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서로를 어떤 영화로 기억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