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10대 민족으로 읽는 패권의 세계사

저   자
미야자키 마사카츠(역:정은희)
출판사
미래의창
출판일
2023년 01월
서   재







  • 왜 어떤 민족은 번성하고, 어떤 민족은 쇠락했을까? 민족의 흥망을 결정지은 역사적 사건과 패권 다툼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0대 민족으로 읽는 패권의 세계사


    왜 근대에 들어와서 민족이 주목받았을까?

    세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새로운 관점을 퍼뜨린 유럽인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민족’이라는 용어에 관해 생각해보자. 세계사 교과서든 해설서든 민족의 정의에 대해 속시원하게 설명해주는 책을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 이유는 19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민족의 의미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전까지 민족은 큰 부족을 중심으로 연합한 ‘부족의 결합체’를 가리켰다. 왕조나 제국 역시 세력이 큰 부족이 지배하는 공동체였다. 황제나 왕, 장군은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셈이다. 사회는 부족 간의 결합 또는 항쟁 그리고 부족을 이끄는 자들의 관계에 의해 움직였다. 민족이라는 말은 상당히 오랫동안 이런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이것을 전통적 개념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19세기 유럽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 근대적 개념의 민족이다. 19세기는 유라시아 변경 지방이었던 북유럽이 빠르게 성장한 시기다. 당시 북유럽에서는 한랭한 기후와 적은 인구 탓에 제국이 형성되기 힘들었다.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있어 다른 큰 제국에 비해 주목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자 철도망, 증기선, 전신망 등이 발달했고,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북유럽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전까지 역사의 주 무대를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를 제치고 ‘작은 유럽’이 세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등의 시민혁명도 유럽 우위의 상황을 더욱 공고히 다지는 데 큰 몫을 했다. 평민층의 참여로 사회가 한층 더 성장하게 된 것이다. 혁명으로 새롭게 탄생한 국가, 즉 국민국가(nation state)에는 당연히 ‘국민’이 필요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혈연집단인 부족의 뒷배가 없는 평민층이 국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귀속 집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민족의 개념이 생겨났다.


    사실 민족이라는 용어는 물리적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인 개념에 가깝다. 이에 학자들은 몇 가지 기준을 정해 민족을 구분했다.


    ■ 피부색 등 생물학적 특징의 동일성(인종)

    ■ 언어의 동일성(어족)

    ■ 공유하는 역사의 동일성, 거주 공간의 동일성


    유럽인들은 이러한 기준을 통해 사람들에게 광대한 땅에 여러 부족들이 결합해서 세워진 아시아의 제국은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으나, 새로운 민족의 개념을 바탕으로 건설된 소규모의 유럽 국가들은 선진화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뒤집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렇게 유럽 우위의 세계관이 만들어졌다.


    익히 알려진 대로 유럽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유라시아의 무굴 제국, 청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이 연달아 멸망했는데, 그 과정에서 ‘하나의 국가=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래서 명확하게 구분되는 각국의 역사가 모여 만들어진 세계사(서양사)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가 대부분 서양사인 까닭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재 기존 역사 인식의 틀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인도와 중국이다. 두 국가 모두 국민들의 언어, 종교, 인종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역사의 기초를 닦은 세 민족

    라틴족-로마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 세계의 토대를 마련한 민족

    지중해와 페니키아인

    세계사를 살펴보면, 각 시대에 힘이 셌던 민족의 주장이 역사를 좌우하여 객관적인 역사 인식을 방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대사 중에서도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그리스, 특히 아테네의 역사가 그 대표적인 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유럽 문명이 헬레니즘(그리스 문명)과 헤브라이즘(기독교)이 합쳐져 형성되었다고 보고, 그리스 역사를 세계사의 원류로 여겼다. 유럽 역사학을 집대성한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1795년~1886년)는 “모든 고대사는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들어 가며, 모든 중세사는 로마라는 호수에서 흘러 나간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정말 맞는 말일까?


    라틴족이 세계 최초의 해양 제국을 건설했던 곳인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세 개의 대륙을 잇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 자원 지대와 교통 지대의 관점에서 보면, 지중해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통 지대에 해당한다. 서아시아와 마찬가지로 건조한 기후 탓에 곡물이 충분히 생산되지 않아, 이집트 등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들여와야 했기 때문이다.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는 포도, 올리브, 무화과 등을 재배하기에는 적절하지만, 밀이나 보리를 키우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연간강수량을 확인해보면 얼마나 건조한 지방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같은 농업지역에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을 ‘오리엔트’로 분리하여 ‘역사는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페니키아인을 이용해 동지중해 상업을 지배했다. 페니키아인들은 그야말로 ‘고대의 종합상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무역 활동을 펼쳤다. 지중해 중앙부에 있는 여러 섬을 잇는 지중해 횡단 항로를 개발한 사람들도 페니키아인이었다.


    페니키아인은 서지중해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시칠리아 해협을 주목했다. 동서로 나뉜 지중해를 연결하는 해협에는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섬 사이에 위치한 메시나 해협 그리고 시칠리아섬과 튀니지 사이에 위치한 시칠리아 해협이 있었지만, 메시나 해협은 조수의 흐름이 빨라서 당시의 배로는 지날 수 없었다. 즉 시칠리아 해협이 유일한 항로였던 셈이다.


    페니키아인은 그곳에 식민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해 다른 상인의 배는 통과시키지 않고 서지중해를 독점으로 지배했다. 다시 말해 지중해는 당시 아케메네스 왕조에 지배를 받던 상업민족 페니키아인의 패권 아래에 있었다.


    라틴족이 대민족으로 성장한 과정

    로마 제국은 지중해에서 곡물을 생산하기 어려워 식량의 40퍼센트를 이집트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지중해 주변의 속주를 수탈하는 것만으로는 로마 시민의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카라칼라 황제는 212년 속주를 포함한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일설에 따르면, 카라칼라 황제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에게서 상속세를 거두는 데 있었다고 한다. 자유민이 아닌 자는 상속세를 지불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은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세계적인 제국으로 확대시켰다는 면에서는 큰 의의가 있다. 지중해 주변 각지에 5천672개난 되는 도시가 세워졌고, 지중해 세계는 빠르게 로마화되었다.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지중해의 여러 민족이 로마에 동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살던 라틴인들도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했고 일부는 카이사르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를 정복한 이후 유럽 각지로 이주했다. 하지만 라틴족만으로는 여전히 인원이 부족했다. 그들은 갈리아 지역에 거주하던 켈트족인 갈리아인을 병사로 등용했으며, 능력과 공적에 따라 발탁하여 원로원 의원 자격도 부여했다. 켈트족을 통해 라틴족은 유럽 세계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했다.


    로마는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평탄하고 직선적인 군사 도로를 만들었다. 무거운 공성 병기와 대량의 군량을 운반하기 위해 오르막길을 최대한 피했고, 강에 다리를 놓고 산을 깎는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단행했으며, 약 15킬로미터 간격으로 도로와 역참을 지키는 군대를 배치했다. 유럽의 주요 도시인 런던, 파리, 빈 등은 모두 로마의 군영 도시에서 발달한 곳이다.


    프라스 시인 라 퐁텐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로마 제국의 변방이었던 유럽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로마 제국은 서유럽의 선주민 켈트족을 받아들여 민족의 규모를 늘리며,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루마니아의 땅을 라틴 민족의 세계로 바꿨다.



    복합적인 세계를 이룬 거대한 농경민족

    인도 민족-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다양성을 유지해온 민족

    카스트 제도를 바탕으로 다양성을 유지해온 민족

    인도는 북쪽에 우뚝 솟은 히말라야산맥 때문에 유목민의 침입이 어려워 여러 민족이 각 지역마다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공존했다. 인도의 공용어는 중국어, 영어와 함께 대표적인 국제 언어로 손꼽히는 힌디어다. 하지만 힌디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인도 인구의 18퍼센트에 불과하며, 힌디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 역시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뿐이라고 한다. 또 다른 공용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 쓰던 영어다. 그 외에도 22개의 언어가 공용어로 쓰이고 있으니, 언어적으로는 전혀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아프가니스탄에서 카이바르 고개를 지나는 경로가 인도로 진출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유목민의 침입이 적었지만, 한편으로는 한 번 인도반도로 진입한 민족은 웬만해서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수의 민족이 각자 생활 터전을 꾸리며 공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11세기 이후,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튀르크계 이슬람 세력이 잇따라 들어와 13세기에는 북인도의 델리를 중심으로 튀르크족의 군사정권인 노예 왕조가 세워졌다. 16세기에는 몽골 제국의 재건을 꿈꾸던 튀르크계 티무르 제국의 잔당이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북인도로 들어와 무굴 제국(1526년~1858년)을 건설했다. 무굴은 튀르크어로 ‘몽골’이라는 뜻으로, 인도에 ‘작은 몽골 제국’이 세워진 셈이다. 그때 정복자 튀르크족의 공용어는 페르시아어였다. 페르시아어와 인도의 힌디어가 섞여서 만들어진 언어가 인도에서 분리된 파키스탄의 공용어 우르두어다.


    카스트 제도가 3천 년 동안 유지된 이유

    다민족 사회인 인도를 하나로 통합해준 것이 바로 카스트 제도다 카스트는 대항해시대 때 인도에 진출한 포르투갈인의 말로 ‘혈통’을 의미한다. 카스트 제도는 백인인 인도·아리아인이 인도로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을 발달시킨 흑인 선주민 드라비다인들을 정복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피부색에 따라 신분을 차별하는 제도다.


    원래 이 제도는 아리아인이 피정복민인 드라비다인들을 노예로 삼아 종교의식에서 배제하고, 사람들의 신분을 신과 그들의 사회를 이어준다고 믿었던 최고층인 브라만, 즉 신관을 비롯해 무사, 귀족인 크샤트리아와 평민인 바이샤 세 계층으로 나누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은 처음에는 카스트 제도를 색깔을 의미하는 ‘바르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정(淨)’과 ‘부정(不淨)’의 관념으로 사람을 구분하였으나 후에는 다양한 직업 집단의 귀천을 따져 세세하게 분류하고 적용하면서 지금의 복잡한 신분제도를  탄생시켰다.


    카스트 제도가 오랫동안 이어진 이유는 이 제도가 다양한 부족이 서로 마찰을 줄이면서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하는 도구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왕조와 부족으로 나뉜 인도에서는 계층이나 직업 등의 기준으로 지역을 넘어선 사람들의 접촉을 제한했다. 신분에 따라 공식(共食), 즉 제물로 바친 동식물을 나누어 먹는 의식, 혼인, 직업의 승계 등에 관한 규칙이 상세하게 정해져 있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할 수 있었다. 많은 민족과 부족이 혼재하는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해둘 필요가 있었단 것이다.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던 인도는 1857년부터 완전한 식민지가 되어 오랜 고난의 시기를 보냈다. 영국은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를 지배하려고 다신교인 힌두교와 일신교인 이슬람교의 대립을 부추겼다. 각자의 영역을 지키면서 공존하고 있던 상태를 깨뜨리기 위한 통치 방식이었다. 20세기에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주의 사상을 내세워 여러 민족, 계층,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외부의 관점으로는 차별을 묵인하는 카스트 제도를 비난하기 쉽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것이 인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드넓은 초원에 제국을 건설한 세 유목민족

    몽골족-유라시아를 통일하고 대규모 교역망을 구축한 민족

    몽골로이드는 아시아인의 대명사

    몽골인이라는 개념에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 두 가지가 있다. 넓은 의미에서 몽골인은 몽골로이드(Mongoloid)를 말한다. 여기서 ‘oid’sms 라틴어로 ‘~을 닮은 자’라는 의미다. 몽골로이드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과 남북 아메리카에 이주한 인류 집단을 가리킨다. 즉, 지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육지에 몽골로이드가 거주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사람이 앞에서 언급한 인류학의 아버지 블루멘바흐다. 그는 갠지스강과 카스피해 동쪽의 광대한 아시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몽골로이드로 보았고, 남북 아메리카에 거주했던 사람들을 몽골로이드의 변종이라고 생각했다.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황인종을 ‘몽골인’이라고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몽골고원이 아시아의 중앙에 위치한 점과 몽골 민족이 유라시아를 통합하는 대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몽골고원은 건조한 기후 때문에 살기 힘든 척박한 땅이라는 점에서 아라비아반도와 쌍벽을 이룬다. 겨울이 되면 이곳은 기온이 영하30도까지 내려가며, 시베리아의 세찬 바람이 대지를 깎아낼 정도로 휘몰아친다. 그런 혹독한 생활환경과 그에 따른 식량 부족 현상은 몽골족이 중국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 원인이자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세운 힘의 원천이었다.


    몽골 제국 시대, 정보 수집을 위해 몽골고원을 방문한 유럽 선교사는 “세계를 제패한 민족의 생활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며 그들의 검소한 생활 모습에 관한 감상을 남긴 적도 있다. 생활 방식이야 어찌 됐든 그들의 기마 기술만큼은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칭기즈 칸이 유라시아에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

    몽골고원은 대초원의 유목민이 비교적 쉽게 농경 지대에서 식량을 수탈해올 수 있었던 지역이었다. 서아시아의 농경 지대까지 진출하기 위해서는 시르다리야강과 아무다리야강 사이에 있는 사막을 지나야 했으며, 인도 쪽에는 히말라야산맥이 있어 침입이 거의 불가능했다.


    몽골고원에서 황허강 유역으로 가는 길은 원래 식량을 수탈하기 가장 쉬운 경로였다. 그런데 칭기즈 칸 시대에는 만주족의 금이 황허강 유역을 진압하고 있어 식량 획득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몽골족은 실크로드에서 활로를 찾았다. 이것이 유라시아에 거대한 몽골 제국이 세워지는 데 큰 발판이 되었다.


    12세기 초 몽골고원이 금의 지배하에 놓이자 만주족은 여러 정책을 펼쳐 몽골족을 서로 대립하게 한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몽골고원을 통일한 이가 테무친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고난의 세월을 거쳤던 그는 40세가 넘었을 때 몽골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1206년에 테무친은 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고원의 장(長)이 되어 ‘지상의 유일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칭기즈 칸(위대한 왕)’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칭기즈 칸은 요가 먼저 진출한 중앙아시아의 상업에 주목했다. 효율적으로 고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교역로를 지배하고, 상인을 보호해주는 대신 그들에게 세금을 징수했다. 또 상업에 특화된 서요를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실크로드의 중심지 소그드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튀르크계 호라즘 왕조(1077년~1231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세력권을 나누려고 했다.


    하지만 사절로 파견된 무슬림 상인단이 살해당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칭기즈 칸이 직접 2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를 차례차례 점령한 끝에 결국 호라즘 왕조까지 무너뜨리게 된다. 또한 실크로드 동부를 지배하고 있던 티베트인 상업 국가 서하(1038년~1227년)까지 멸망시킨다. 몽골 제국은 이와 같이 중앙아시아의 상업로를 일괄적으로 지배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단시간에 나라를 유라시아 규모의 상업 제국으로 성장시켰던 칭기즈 칸은 바로 그 시점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군사력과 상업으로 세계화를 이룬 두 민족

    유대민족-상업 기술과 자금으로 세계 자본주의를 이끈 민족

    작지만 강한 상업민족

    유대 민족은 원래 아랍족과 같은 셈계 민족으로, 한때는 히브리인이라고 불렸다. 히브리란 히브리어로 ‘유랑하다’라는 의미다. 그들은 유프라테스강을 넘어 대곡창 지대인 이집트와 접해 있는 가나안, 지금의 팔레스타인에 이주하여 상업민족이 되었다. 상업의 기본이 ‘여행’이었으니, 그들과 걸맞은 이름이었다.


    현재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스라엘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 민족의 수는 약 1천 460만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세계 10대 민족으로 꼽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상업의 귀재라고 할 수 있는 유대 민족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유대 민족의 노벨상 수상자 비율은 타 민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세계화가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세계 금융을 움직이고 인터넷 산업을 지탱하며,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성장시키고, 다이아몬드 유통을 독점하고 있는 민족이 바로 유대인이다.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상업 기술과 자금 그리고 정보를 공유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상업 네트워크가 유대 민족의 가장 큰 강점이다.


    지폐를 발행해 세계 경제를 주름잡다

    이베리아반도의 유대 민족에게 대항해시대는 큰 수난기였다.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가 함락되자 스페인은 내부의 유대 민족을 기독교로 개종시켜 순수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고 했다.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교들을 국외로 추방했으며, 포르투갈도 곧 그런 움직임에 동조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많은 유대인이 추방된 이 사건을 제2의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대부분은 이슬람 세계로 이주했지만, 일부는 경제 발흥기를 맞은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유대인은 네덜란드에 매우 귀중한 인재였다. 네덜란드로 이주한 유대 민족은 경제적으로 선진화된 이슬람 세계의 상업 기술과 어음을 네덜란드 사회에 전해줬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상업이 대규모로 확장되어 이미 어음과 수표가 보급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기 재산이 언제 트집 잡혀 몰수될지 몰랐기 때문에, 무기명어음을 발행하여 재산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무기명어음은 수취인이 따로 적혀 있지 않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돈을 모으기에 매우 편리했다. 유대인으로부터 어음의 원리를 배운 네덜란드는 직접 국채라는 무기명어음을 발행하여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도 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제2차 백년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에서는 정부가 국채를 과다 발행해 인수인이 없어진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유대인 상인이 민간에서 직접 잉글랜드 은행을 조직해 저금리로 국가에 융자를 해주는 대신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단순한 종잇조각으로 보이는 지폐가 은화나 금화와 동일하게 취급받게 된 것이다. 남에게 빌려주면 이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상인들은 큰돈을 벌었다.


    19세기 영국은 세계의 기축통화를 은화에서 금화로 바꾸고, 금화가 부족할 때 파운드 지폐로 보충해 자신들의 화폐를 국제통화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아시아의 은화 경제를 무너뜨려 큰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 실무를 담당한 조직이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유대인 상인이 운영하는 잉글랜드 은행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 영국이 쇠약해진 뒤에도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유대인계 은행들이 장악한 미국의 월가가 달러 지폐를 통해 세계 경제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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