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강제혁신

저   자
이주희
출판사
EBS BOOKS
출판일
2023년 06월
서   재







  • 전쟁터에서 찾은 삶의 승패를 가르는 조건! 그 어떤 곳보다 승패가 명료한 혁신의 현장 ‘전쟁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역사의 교훈과 마주해봅니다.



    강제혁신


    혁신은 기득권을 공격한다

    정체성, 전쟁의 승패를 가르다

    화약을 증오한 권력자, 맘루크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화학 무기였다. 대포와 화승총의 일제사격이 250년간 패배를 몰랐던 맘루크들을 간단히 분쇄해 버린 것이다. 문제는 왜 맘루크들은 화약 무기도 없이 무모한 돌격을 감행했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정리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왜 맘루크는 화학 무기라는 혁신을 거부하고 오스만은 혁신을 받아들였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 가능성은 맘루크들이 오스만제국의 화학 무기에 대해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돌격하는 돈키호테식의 대응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우 상식적인 추측이기는 해도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선 오스만제국이 화학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비밀이 될 수 없었다. 유명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부터 오스만은 화학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마지 다비크 전투가 1516년에 벌어졌고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 1453년에 있었으므로 이 두 전투 사이에는 63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중세의 정보 전달이 아무리 늦었다고 하더라도 63년 동안 눈을 감고 있지 않는 한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오스만제국은 맘루크 술탄국 제1의 가상적국이었다. 비록 패배했어도 결코 무능하지는 않았던 맘루크의 지도자들이 이런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이다.


    그렇다면 문화적 보수성이 작용한 것일까? 오스만제국이 진취적이었던데 반해 맘루크들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정말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무가치한 대답이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설혹 맘루크들이 문화적으로 더 보수적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대답에는 “왜 보수적이 되었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무엇도 설명하지 못하는 대답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실관계로 살펴볼 때도 맘루크들이 특별히 더 보수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스만제국과 맘루크 술탄국은 모두 정통파인 수니파 이슬람 국가였고, 어느 쪽도 이민족에게 배타적인 순혈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세 번째로 생각해 볼 가능성은 유럽과의 지리적 거리다. 지금이라도 지도를 펴서 터키와 이집트의 위치를 확인해 보면 이 설명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질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이어받은 튀르키예는 유럽과 국경을 바짝 맞대고 있다.


    지금도 그리스나 불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한창 팽창하던 16세기에는 헝가리나 오스트리아가 오스만제국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거의 유럽 국가나 마찬가지다. 반면 이집트는 지금이나 16세기에나 유럽과의 사이에 지중해를 두고 있다. 직접 육지로 연결된 유럽 국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집트에 자리 잡은 맘루크 술탄국은 오스만제국에 비해 아무래도 신기술을 도입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보의 부족이니 문화적 보수성, 지리적 불리함 탓이 아니라면 무엇이 맘루크들로 하여금 화학 무기를 도외시하게 만든 것일까? 헤라클레스나 아이손처럼 자긍심 넘치는 영웅들이던 맘루크들은 자신들이 화학 무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나 사용하는 더러운 무기를 손에 대는 것은 치욕으로 받아들여졌다.


    “맘루크들이 총을 드는 순간 맘루크는 더는 맘루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총을 드는 순간 맘루크는 맘루크가 아닌 것이 될까? 이쯤에서 우리는 앞서 설명한 맘루크의 특징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노예이면서 엘리트다. 완전히 이질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도저히 연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이 이질적인 두 단어를 연결하는 것은 맘루크들의 전투기술인 ‘푸루시이야’였다. 이 특별한 전투기술은 마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선수처럼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일종의 진입장벽처럼 맘루크들의 지위를 지켜주는 방패이기도 했다.


    그런데 맘루크들이 총을 드는 순간, 이 기술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여자들조차 쓸 수 있는 총이 있는데 구태여 맘루크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입장벽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진입장벽이 사라지고 나면 맘루크들은 여느 이집트인들과 똑같은 존재가 된다. 당연히 엘리트 대접도 사라질 것이다.


    결국 화학 무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단순히 새로운 무기 한 종류를 늘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맘루크들이 가진 권력의 기반이던 ‘푸루시이야’를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당연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 엘리트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이집트를 위해서 대승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기꺼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준다면 현명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 집단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혁신적 기술은 항상 기득권을 공격하게 되고, 혁신은 권력투쟁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더구나 맘루크 술탄은 세습이 아니라 맘루크 집단 안에서 승진을 통해 올라가는 자리였다. 이 점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권력이 술탄 개인이 아니라 맘루크 전체에게 있었기 때문에 전체 맘루크들의 정체성이나 이해관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술탄 자신도 맘루크들이 가진 정체성의 포로였던 것이다.



    서양 우위의 분기점

    혁신을 강제하는 경쟁의 힘

    이상한 나라의 붉은 여왕 효과

    진화론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붉은 여왕 효과’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진화 생물학자 리 밴 베일런이 처음 제기한 이론인데,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이 에피소드에서 앨리스는 붉은 여왕과 함께 엄청난 속도로 나무 밑을 달리는데 아무리 달려도 주위 풍경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밴 베일런은 종(種)의 진화와 멸종을 설명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세웠다. 어느 한 종이 진화할 때 그 종을 둘러싼 다른 종들도 같이 진화한다. 즉 주변 환경도 같이 진화한다는 뜻이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처럼 진화의 달리기가 계속되므로, 이런 환경에서 어느 한 종이 진화를 멈춘다면 그 종이 서 있는 곳은 제자리일 수가 없다. 계속 뒤로 밀려나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멸종이다. 여러 종 사이의 경쟁이 끊임없는 진화를 촉진하는 셈이다.


    근대 유럽도 말하자면 붉은 여왕의 나라였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처럼 유럽 열강도 전쟁이라는 끝없이 치열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었다. 당연히 화약혁명에 대처하는 자세도 지구상의 다른 지역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맘루크들처럼 중무장한 기병이던 유럽의 기사들도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화약혁명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기득권을 가진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처럼 유럽의 기사들도 혁신을 반기지 않았다. 맘루크들만큼이나 기사들도 화약 무기를 증오했다.


    하지만 열강의 생존경쟁이라는 유럽의 환경은 기사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빼앗았다. 경쟁이 기사들에게 화약혁명에 적응할 것을 강제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이 쳐들어올 때까지 화약 무기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던 맘루크들과 달리 유럽의 기사들은 ‘화약 무기이냐 죽음이냐’라는 선택을 매일 마주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몇 차례 시대착오적인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유럽의 기사들은 결국 화약 무기를 손에 들 수밖에 없었다. 경쟁이라는 강제력이 화약혁명이라는 혁신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경쟁이라는 강제력이 권력자들에게 혁신을 받아들일 것을 강제한 것이다. 결국 모든 나라가 기사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화약혁명에서 한 걸음이라도 앞서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엘 시드의 나라인 스페인, 아서왕의 나라인 영국, 롤랑의 나라이자 십자군의 주역인 프랑스까지 예외는 없었다.


    모두가 사력을 다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이웃 나라를 완전히 제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스페인이 새로운 혁신을 이루면 곧바로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뒤쫓아 왔고, 네덜란드의 군사적 혁신은 곧바로 스웨덴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아무리 뛰어난 발명가가 나와도, 아무리 천재적인 전략가가 나와도 기껏해야 반걸음 정도 앞서는 것이 고작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잃어버린 200년

    위기의식, 발전의 속도를 가르다

    겐나엔부, 모든 하극상을 금하다

    처음 화학 무기가 등장했을 때는 이집트의 맘루크들도, 유럽의 기사들도 모두 화학 무기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었다. 다만 유럽 내부의 지속적인 경쟁 상태는 이런 적대감과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화학 무기의 확산을 가져왔고, 화학 무기 없이는 패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유럽의 기사들은 결국 말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그런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집트 맘루크들은 화학 무기를 금지하고 계속 말 위에서 지배하는 쪽을 선택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화학 무기가 처음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센고쿠 시대라는 무한 경쟁의 시기였기에 무사들도 혐오감을 접고 적극적으로 조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조총은 당연히 금지해야 할 혐오스러운 물건이 되었다. 일본에서 조총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청제국의 시대, 길 잃은 혁신

    일본이 화학 무기로부터 후퇴하던 순간, 중국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명청교체기가 끝나고 청나라의 패권에 기반한 평화가 시작된 것이다. 청나라 조정은 일본의 막부처럼 공식적으로 화학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삼전의 난이 진압된 이후 이른바 강희, 옹정, 건륭 연간의 오랜 평화가 찾아오자 화학 무기의 필요성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간혹 청의 패권에 도전하는 유목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청제국에 이들을 토벌하는 일은 황제의 영광을 보여주는 화려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 목걸이에 항상 자살용 독약을 넣고 전쟁터를 누볐던 프리드리히 2세의 절박감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대청제국이 사용하던 군사비를 유럽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18세기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는 아마도 청나라의 건륭제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일텐데, 대체로 재위 기간이 겹치는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전쟁도 벌였다. 각각 1755년과 1756년의 일이다.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7년 전쟁이 일어났고, 동아시아에서는 청나라에 의한 신장정복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유럽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각각 3억 9200만 굴덴과 1억 5200만 탈러를 전쟁 비용으로 사용했다. 이를 구매력 기준으로 환산하면 각각 50억 달러와 27억 달러 정도가 된다. 그러면 청나라는 신장에서 전쟁 비용을 얼마나 썼을까? 건륭제 재위 중에 벌어진 가장 큰 정복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에서 청나라가 사용한 비용은 대략 1700만 냥 정도라고 한다. 쌀값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18억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다.


    청나라의 군사비는 100분의 1규모의 소국이 프로이센보다 적었지만 항상 주변국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청나라 주변의 적국들이 청나라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빈약한 자원을 가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청나라의 건륭제는 전쟁에서 진다거나 독약을 먹는다거나 하는 일은 아마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안보상의 위협도 없는 완벽한 평화가 100년 넘게 이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청나라의 지배계급이 유목 전사의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화학 무기에 매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 문제는 단지 과거의 대제국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현대의 대기업들조차 비슷한 이유로 혁신을 거부하거나 혁신에 뒤처지고는 한다.


    결과적으로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서 화학 무기는 잊히거나 정체되어 갔다. 당연히 홍이포나 조총의 뒤를 잇는 신무기 개발은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 되었다. 신무기는커녕 가지고 있던 홍이포나 조총조차 창고에서 녹이 슬어갔다. 급기야 19세기 일본 근해에서의 침몰 사고로 일본 땅에 상륙한 미국 선원은 일본성에 실제 대포는 없고 대포를 그린 큰 걸개그림만이 걸려 있는 것을 목격할 지경이었다. 생존경쟁이 사라지고, 위기의식이 사라지자 화약혁명도 함께 사라진 것이다.


    17세기 이후의 군사혁신이 동아시아에서 중단되고 유럽에서 계속된 원인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다. 독약을 항상 목에 걸고 다녀야 할 정도로 절박한 위기의식 속에 살아가는 자와 전쟁을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정도로 여겨도 되는 자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정도가 결국 위기의식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유럽과 같이 비슷한 규모와 실력을 갖춘 국가들이 경쟁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강제력이 존재했다. 이웃 나라가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군사적 혁신을 거부하는 것은 곧바로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이 위기의식을 낳고 위기의식이 혁신을 강제한 것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청나라의 패권은 압도적이었고 조선이나 일본도 자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오랜 평화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권력의 이익을 반하는 혁신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혁신이라는 수레바퀴는 생존경쟁과 위기의식이라는 강제력 없이는 앞으로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혁신가의 또 다른 이름, 반역자

    충성심, 혁신의 미래를 바꾸다

    권력을 거부한 자들의 근대화

    사람들이 혁신적 변화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지점이 하나 있다. 성공한 혁신은 이미 혁신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이든 분명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 혁신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혁신의 역사는 우연과 좌충우돌의 역사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만드는 과정이니 쉽게 계획할 수도 없을뿐더러 계획을 하더라도 계획대로 되는 경우도 없다. 혁신은 계획될 수 없다.


    바스티유 습격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이 사건이 유럽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차고에서 첫 번째 PC를 만들었을 때 PC가 세상을 새로 창조하다시피 바꿀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 역시 없었다. 잡스 본인조차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처럼 근본적인 혁신은 일단 시작되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변화를 촉발한다. 이것은 혁신을 시작한 사람의 처음 의도와 무관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가속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운전대를 누가 잡고 있느냐?’가 혁신의 미래를 결정한다.


    혁신의 운전대는 현기증 나는 가속에도 불구하고 겁 없이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는 혁신가들의 손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혁신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특히 혁신으로 손해를 볼 자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면 혁신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 가속 페달은커녕 쓰러질 듯한 현기증이 두려워 감속 페달만 밟다가 시기를 놓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것이 이후 청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증국번과 이홍장은 그렇게 자진해 운전석에서 내려왔다. 이후 청나라가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왔을 때, 운전대를 잡은 것은 청나라 황실이었다. 혁신으로 물러나야 할 자들이 변화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기존 시스템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던 기득권이었고, 심지어 중국 한족들과는 이질적 이민족 왕조였던 청나라가 근대적 민족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증국번과 이홍장이 운전대를 포기함으로써 청나라에서 혁신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증국번이나 이홍장이라고 해서 근대적 개혁을 제대로 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아무리 증국번이나 이홍장이 유능한 관료였다고 해도 꼭 근대화에 성공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1860년대에 증국번이나 이홍장의 세계관이 온전하게 근대적 세계관에 도달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근대화에 대한 체계적 비전도 부족했다.


    하지만 양무운동을 주도하고 독자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고 서양의 최신 과학 서적까지 꾸준히 번역했던 이들이 아무려면 서태후가 이끌던 청나라 황실보다 혁신에 부정적이기야 했겠는가? 이들이 직접 권력을 잡고 있었다면 최소한 북양함대가 청일전쟁에서 포탄이 모자르다는 이유로 해전을 못 치르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역자들이 이룬 근대화

    삿초동맹 이후 일본의 정세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급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조슈 번의 군비 증강, 막부의 조슈 정벌 실패,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거쳐 막부를 붕괴시킨 보신 전쟁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사건이 벌어졌다. 삿초동맹이 만들어지던 1866년에는 그 누구도 설마 이 정도까지 일이 진전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1868년 4월 11일, 삿초동맹이 맺어진 지 2년 만에 막부가 항복함으로써 유신파들은 일본의 미래를 결정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마침내 혁신의 운전대를 직접 잡게 된 것이다.


    혁신에서 운전대를 직접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보신 전쟁 이후의 역사가 증명한다. 삿초동맹에서 막부 붕괴까지의 사태 진전 또한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막부 붕괴 이후 개혁의 속도는 유신파 본인들도 놀랄 정도로 급격한 것이었다. 마치 비탈을 굴러가기 시작한 수레처럼 메이지 유신 초기 일련의 개혁 조치들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급진적인 것이었다.


    사태의 진전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는지는 메이지유신 직후 사쓰마 번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슈 번과 함께 메이지유신의 양대 기둥이었고, 막부 토벌군 군사력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고 있던 사쓰마 번에서는 시마즈 히사미쓰가 사실상의 다이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앞서 잠시 나왔던 나마무기 사건의 주인공인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런 히사미쓰조차 막부를 무너뜨리고 나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막부를 무너뜨리는 것까지는 동의해도 자신이 가진 봉건적 특권을 건드리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봉건 영지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부와 현으로 바꾸는 폐번치현 같은 조치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구성과 함께 운전대는 이미 자신의 가신에 불과했던 오쿠보와 사이고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들이 쿠데타와 같은 전격적인 방법으로 폐번치현을 단행해도 이를 저지할 방법이 히사미쓰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무력하게 번이 폐지되는 상황을 맞이한 히사미쓰는 불꽃놀이를 하며 울분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다이묘 다음 순서는 사무라이였다. 신분제가 폐지되고 사무라이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도 막부가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던 유신파는 이 조치도 전격적으로 시행해 버렸다. 졸지에 실업자가 된 사무라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곳곳에서 어제의 동료였던 사무라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가장 큰 반란이 세이난 전쟁이라 불리는 가고시마의 반란인데, 가고시마현은 폐번치현 이전에 사쓰마 번이던 곳이었다. 메이지유신의 기반이 되었던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그 반란의 우두머리는 놀랍게도 유신3걸 중 한 사람인 사이고였다.


    2004년에 개봉한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바로 세이난 전쟁이다. 영화에서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사무라이들의 대장이 바로 사이고를 모델로 창조해 낸 인물이다. 혁신의 속도는 막부를 무너뜨린 보신 전쟁의 총사령관이자 메이지유신의 1등공신이던 사이고조차 따라가지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었다. 그리고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는 그가 사이고라도 가차 없이 제거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혁신의 속도는 언제나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어제까지 진보적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보수파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 혁신이다. 계획된 대로, 혹은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혁신을 추구하는 자들은 운전대를 직접 잡아야 한다. 반역자가 될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반역자가 되지 않으면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할 때 거침없이 밟을 수 있는 권력을 얻을 수 없다.


    일본의 유신파가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 역시 청나라의 양무파와 달리 반역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역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직접 권력을 잡을 수 있었고, 권력을 손에 넣었기에 현기증 나게 진행되는 혁신의 순간에 겁 없이 가속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마주 앉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암은 혁신이 시작되던 30년 전에 ‘운전대를 직접 잡았는가? 거부했는가?’로 이미 결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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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