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기황후 1

저   자
장영철·정경순
출판사
마음의숲
출판일
2013년 10월
서   재







  • MBC 대하드라마 ‘기황후’의 원작 소설로 드라마의 극본을 맡은 두 저자가 직접 집필한 장편 소설 『기황후』 제1권. 2008년 초입 문제적 인물의 삶에 뜨거운 작가적 호기심을 가지고 기황후를 극화하겠다고 마음먹은 후 그동안 제대로 복원되지 않았던 삶을 치밀한 자료 조사와 고증을 거쳐 생생하게 살려내고자 했다.



    기황후 1


    작가의 말

    처음 기황후를 극화하겠다고 마음먹었던 때가 2008년 초입쯤이었다. 대하사극 대조영 집필을 끝낸 후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있을 때 우연히 보게 된 다큐멘터리 한 편이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부터 700년 전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가 황후가 되고, 그 후 수십 년간 대륙을 경영했던 고려의 여인 기황후에 관한 이야기였다.


    원사(元史)나 고려사(高麗史) 등에 언급된 그녀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오빠들, 즉 기철 형제들로 인해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이민족 출신의 여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야만 했던 중국의 봉건적인 시각에서 기술된 역사서가 그녀를 좋게 묘사할 리도 없었다. 또한 황후가 된 후 공녀 차출을 금지시키고, 교역을 통해 고려의 문화와 물품을 대륙에 전파했으며, 원나라가 고려의 국호를 없애려 했던 입성론을 막아 낸 결정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킬 리 만무했다.


    그녀는 우리 역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기황후라는 이름 석 자에 명과 암이 공존하고 선악이 혼재되어 있다. 그 베일에 가려진 문제적 인물의 삶이 뜨거운 작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사학자들의 논문으로 살점을 붙이기엔 그녀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의 뼈대가 너무도 앙상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숱한 소설과 드라마들이 그렇듯이, 개연성 있는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앙상한 뼈대와 빈약한 살점에 스토리를 입히고 생기를 불어넣어 21세기에 요구되는 기황후를 재현해 내는 이번 작업에 형벌과도 같은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1장 슬픈 꽃, 공녀

    운명적인 첫 만남

    병사 복장의 양이가 소리 없는 비명을 토해 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기에 군막 안은 어두컴컴했다. 양이는 며칠째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양이가 땀에 흠뻑 젖은 군복을 벗었다. 양이가 남아 있던 홑겹 웃옷을 벗자 가슴을 감싼 무명천이 드러났다. 그날 이후로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양이는 사내아이로 자라 왔다. 하나뿐인 딸이 공녀로 끌려가는 것을 절대 볼 수 없었던 아비 기자오의 뜻이었다.


    땀에 젖은 무명천을 풀려는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재빨리 옷을 다시 입은 양이는 조용히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군막 위에 숨은 자의 손목을 낚아채 내동댕이쳤다. 양이는 바닥에 쓰러진 남루한 차림의 사내를 밟고 앉아 주먹을 퍼부었다.


    그 사내는 훗날 원나라 16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타환첩목이, 곧 순제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야 했지만 원나라 권신(권세를 잡은 신하)이었던 연철과 그 세력들의 견제에 밀려 어린 동생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고려 땅으로 유배를 가는 중이었다.


    유배 행렬의 고려 쪽 주장이었던 기자오는 원나라 쪽 주장인 백안에게 제안해 황태제(황제의 자리를 계승할 황제의 동생)인 타환을 수레에게 내리게 한 뒤 허름한 행색으로 무리 속에 숨겨 두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남자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양이와 황태제인 신분을 숨겨야 하는 타환의 운명적인 첫 만남은 이처럼 어이없이 끝나고 말았다.


    대청도의 봄

    대청도의 봄은 유난히 평화로웠다. 그러나 타환이 머물고 있는 관사의 경계는 여전히 삼엄했다. 기자오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청도에 들어온 이상 더 이상의 위험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충혜왕의 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양이 또한 자신의 직분을 다하며 타환을 보필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에 잠이 들 때까지, 양이는 타환의 그림자로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곤혹스럽기로 따지자면 타환도 마찬가지였다. 양이는 자신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던 불한당 같은 놈이라 생각했다. 그런 놈의 시중을 받아야 하니 타환도 죽을 맛이었다. 타환에게 양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옆에 있으면 성가시고 불편했지만 잠시라도 눈에 띄지 않으면 허전하고 또 불편했다.


    어느 봄기운 가득한 날, 타환과 양이가 말을 타고 나란히 들판에 섰다. 맞은편 바닷가까지 말타기 사합을 하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출발했다. 파랗던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한 경주가 이어졌다. 간발의 차이로 앞선 양이가 드디어 결승선을 눈앞에 두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타환이 자신이 타고 있던 말에서 몸을 던져 양이를 덮쳤다. 두 사람은 이내 말에서 떨어져 모래밭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어 두 사람의 치열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결국 세상이 모두 어둠에 잠긴 후, 온몸에 싸울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무렵에야 비로소 싸움이 끝났다.


    먼 바다를 보던 타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뜻밖의 광경에 양이는 무척 놀랐다. 타환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다. 꼭 살아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훗날 내 아버지를 죽이고 내게 이런 시련을 준 그자들을 반드시 죽여 없애고 싶다.…."


    타환의 나지막한 절규에 양이의 마음 깊은 곳이 저려 왔다. 양이는 처음으로 타환이 대원제국의 황태제가 아닌, 두려움에 떠는 애송이가 아닌, 기쁨에 웃고 슬픔에 눈물짓는 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타환의 눈물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모르는 두 사람에게 대청도의 봄은 그렇게 푸르게 깊어만 가고 있었다.


    미끼와 덫

    "대청도에서 반란이 발생했다 하옵니다."

    "대청도에서 반란이?"

    "예. 고려 군사들이 황태제 전하와 원나라 관리들을 모조리 죽였다 하옵니다."

    "무어라?"


    연철이 짐짓 놀라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절묘한 때라 생각했다. 하늘의 뜻을 땅에서 펼치는 것은 사람의 몫, 그러니 일을 성사시키자면 서둘러야 했다. 연철은 한달음에 충혜왕에게 갔다.


    충혜왕과 연철, 왕고와 경화공주가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앞으로 피투성이가 된 기자오와 몇몇 고려 관리들이 끌려 나왔다. 충혜왕이 한걸음에 달려 나가 기자오의 손을 부여잡았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러나 이미 혀가 뽑히고 눈이 먼 기자오는 안타깝게 피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기자오의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노릇이었다. 하지만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으니, 진실을 알릴 방도가 없었다.


    그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관리 중 한 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일갈했다.

    "모두 거짓입니다! 전하, 이 모두가 원나라가 꾸민 함정입니다! 저들의 협박이 두려워 거짓을 고했습니다!"


    순간 탑자해의 칼날이 그자의 목을 내리쳤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새어 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전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왕고가 간계를 냈다.

    "이번에 끌려온 기자오의 아들 승냥이란 놈이 황태제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둘이 늘 붙어 다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황태제가 아직 살아 있다면 반드시 그놈과 함께일 것입니다. 양이란 놈을 잡아들이면 타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곧이어 양이의 초상화와 함께 반란을 주도한 기자오, 그리고 그 일당들이 곧 처형될 것이라는 방이 전국 곳곳에 나붙었다. 덫을 놓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양이가 입궁하기로 한 날 밤이 왔다. 횃불이 환하게 켜진 궁 안 마당에 충혜왕과 연철 일행, 왕고, 경화공주와 문무신료들이 모두 나와 타환의 시신이 당도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양이와 박불화가 고려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대청도를 습격한 군사는 고려 군사들이었소."


    양이로서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꿈도 꾸지 않은 일이었다. 타환의 배신이라니, 저토록 태연하게 거짓을 입에 담다니. 양이는 그가 진실을 밝혀 주리라는 믿음 하나로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켰다. 대청도에서 이곳 개경까지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거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들 이처럼 허망하지는 않을 터였다.

    "거짓입니다. 황태제 전하, 부디 진실을 말씀하소서!"

    양이가 날뛰기 시작하자 원나라 군사들이 이를 제압했다. 양이의 소동에도 아랑곳없이 타환이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기자오가 고려 군사들을 끌어들여 나를 죽이려 했소. 내 두 눈으로 틀림없이 목격한 사실이오."


    그날 밤, 기자오는 양이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양이는 죽은 기자오의 시신을 끌어안고 짐승처럼 울었다. 타환 역시 거소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아버지 명종을 암살한 것도, 자신을 대청도로 유배시킨 것도, 그곳으로 화적 떼를 보낸 것도 모두 연철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그런 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서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연철의 가랑이 사이라도 지나가야 했다. 목숨을 부지해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언젠가 황권을 되찾고 연철을 무너뜨릴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비극의 밤

    원나라로부터 충혜왕의 폐위를 알리는 교지가 당도했다. 뒤를 이을 고려 국왕은 원나라에 가 있는 충혜왕의 아버지 충숙왕으로 결정되었다. 고려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왕고가 권좌를 이어받는 것보다는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하지만 충혜왕은 깊은 좌절에 빠졌다. 원나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주권을 회복하려는 자신의 원대한 꿈이 꺾였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왕궁이 한바탕 소란에 휩싸였다. 양이와 박불화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왕고가 알게 된 것이었다. 왕고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사를 풀어 뒤를 쫓게 했다. 물론 충혜왕이 손을 썼을 것이라 짐작은 했지만 아직까지는 고려 왕궁에서 충혜왕에게 책임을 추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이와 박불화를 다시 잡아들여 왕고 제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천민 출신에 말직 병졸이었지만 늘 출세를 꿈꿔 온 염병수였다. 그는 살면서 한 번은 기회가 올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양이가 제 발로 걸어와 눈앞에 나타난 순간, 염병수는 직감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길로 곧장 왕고에게 달려갔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사람대접 받으며 살 수 있다면, 염병수는 기자오의 딸이 아니라 더한 것도 팔아넘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양이는 또다시 잡혀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환관이 아닌 공녀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초야권

    공녀들의 행렬이 압록강을 건너자 원나라 쪽 관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들이 왕고를 찾아와 통고했다.

    "이쯤에서 초야권을 행사하겠소."


    초야권이란 공녀들을 차출해 가는 원나라 관리들이 여인들의 첫 순결을 빼앗아 가는, 일종의 암묵적인 관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황제의 후궁으로 선출된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들의 손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왕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막으로 끌려 들어온 양이는 독기 어린 눈으로 왕고를 노려봤다. 왕고는 기어이 양이를 덮쳤다. 그러나 무술로 단련된 양이는 순식간에 왕고의 가슴팍에 주먹을 꽂아 넣으며 대항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날카로운 칼날이 왕고의 목을 겨누며 파고 들었다. 왕고가 화들짝 놀라 얼어붙었다.


    충혜왕이었다. 

    "저 계집의 초야권은 내가 행사할 것이다!"


    충혜왕은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는 양이의 팔을 단숨에 낚아채 밖으로 나가버렸다. 제아무리 왕고라지만 초야권을 행사하겠다는 충혜왕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타환은 원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즉위식을 마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약속대로 연철의 딸인 타나실리를 정실황후로 맞았다. 그가 바로 원나라 16대 황제, 순제였다. 그러나 허울뿐인 황제였으니 모든 권력은 연철을 중심으로 한 그 일가가 장악하고 있었다.


    액정궁은 황제의 후궁들과 궁녀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황궁 안에서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양이는 액정궁에서도 가장 하급 일을 맡게 되었다. 말이 좋아 궁녀이지 종과 다름없는 직분이었다. 종일 액정궁 안의 마루를 닦거나 빨래 등의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다. 일과가 끝나고 다들 숙소로 들어갈 때는 궁 안 구석의 독방에 있는 노상궁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양이가 이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은 순전히 순제 때문이었다. 처음 황제의 행차가 있던 날, 지나가는 순제의 발치에서 양이는 그를 죽이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그날부터 양이는 놋젓가락을 갈기 시작했다. 순제의 심장에 비수를 깊이 꽂아 넣어야만 사무친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제가 액정궁 출입이 잦은 것은 현빈 박씨 때문이었다. 박씨는 양이가 궁녀로 끌려올 때 순제의 후궁으로 낙점되어 온 고려 여인이었다. 타나실리의 표독스러움에 기가 질린 순제에게 다정다감한 박씨는 편안한 휴식처와 같았다. 무엇보다도 양이는 고려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끝내 살아야 할 이유

    충혜왕의 관심은 온통 액정궁 안의 양이에게 쏠려 있었다. 꿈 같은 밤을 함께 지새운 그날, 충혜왕은 양이에게 고려로 함께 돌아가자고 약속했다. 그때까지 자신을 믿고 기다려 달라고. 양이는 그런 자신에게 은비녀를 건네며 화답했다. 고려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양이를 위해서라도 충혜왕은 권좌를 되찾아 고려로 돌아가야만 했다.


    임신이라니, 그분의 씨앗을 품게 되다니….

    망연해 하는 양이에게 박씨가 복대를 가져다 주었다. 이제 양이는 여자임을 숨기려고 가슴을 감쌌던 복대를 배에 둘러야 했다. 복대를 감아 주던 박씨에게 양이가 조용히 물었다.

    "그 자를 죽이고 싶었던 적이 없으셨나요?"

    "누구 말이냐."

    "우리에게서 고향과 가족을 빼앗은 그자, 원나라 황제 말입니다."


    현빈 박씨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러나 용기도 없었거니와 그 뒤에 몰아칠 폭풍이 두려웠다. 내가 그분의 목숨을 거두면 이곳에 와 있는 다른 고려 출신 궁녀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으니. 안 그래도 가여운 이들이 아니냐. 그래서 마음먹었다. 내 차라리 이곳에서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장 힘 있는 후궁이 되리라고. 그리되면 내 힘으로 많은 고려인들을 보살펴 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양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끝내 살아남는 것, 살아서 성공하는 것, 성공해서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 그런 길도 있다는 것을 양이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박씨가 품은 삶의 의지는 양이가 품은 죽음에 대한 의지보다 더 숭고했다. 양이는 박씨를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삶을 통해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이리라.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복대로 아기를 감싸며 양이는 새로운 목표를 마음에 새겼다. 그것은 바로 생존이었다.


    청동거울의 비밀

    타나실리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식이었다. 정실황후인 자신보다도 고려의 천한 후궁이 먼저 황제의 씨를 품었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의를 시켜 박씨를 독살시키겠다는 타나실리를 만류한 사람은 왕고였다. 왕고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박씨를 죽이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이란 참으로 교활하고 잔인했다.


    사태를 알게 된 양이가 황급히 박씨를 만났다.

    "지금 당장 저와 함께 궁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박씨와 양이가 박불화, 고용보와 함께 궁을 빠져나가자마자 후궁전으로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후궁전의 궁녀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하지만 박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타나실리는 분노했다.

    "후궁 한 명과 궁을 빠져나간 듯합니다."

    "이런, 어서 쫓아라!"


    산비탈에서 넘어지고 구르기를 수십 번. 임신을 한 몸으로 도망치기에는 너무도 험한 산길이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악착같이 함께 도망치려는 양이에게 박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저었다.

    "너라도 살아라. 꼭 살아서… 고려인의 한을 전해 주어라. 뱃속의 아기만은 이런 험한 꼴을 당하지 않게…. 다음 생에는 우리 진짜 자매로 태어나자꾸나."


    박씨가 양이의 꼭 잡은 손을 매몰차게 떼어 냈다. 그러고는 부러 염병수의 눈에 띈 후, 양이와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이도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돌아보았을 때 박씨는 양이를 뒤쫓으려는 염병수의 두 다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순간 약이 바짝 오른 염병수의 칼날이 박씨의 뱃속 깊숙이 박혔다. 박씨 대신 양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체할 수 없었다. 양이는 달리고 또 달렸다. 박씨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양이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다시 한 번 박씨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본 순간, 허공을 뚫고 날아온 화살이 양이의 가슴팍에 꽂혔다.

    "아악!"


    작은 동굴에 몸을 숨긴 양이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화살은 가슴에 품고 있던 청동거울에 맞았다. 노상궁이 주었던 바로 그 거울이 양이의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후궁 경선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노예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양이를 사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양이를 지목하고 나선 이가 있었다. 바로 탈탈이었다. 백안의 조카이자 책사인 탈탈은 순제의 유배 때부터 양이를 알고 있었다. 공녀가 되어 원나라에 끌려온 사연까지도 제법 소상히 알고 있던 탈탈은 양이를 보자 지체없이 돈을 지불하고 백안의 집으로 데려왔다.


    "풀어 줄 테니 고려로 돌아가라. 이곳에서의 일은 다 잊어버리고 고향 땅에서 웃음을 되찾고 행복하게 살아라…."


    양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백안의 집을 나왔다. 양이의 봇짐에는 얼마간의 노자와 먹을 것이 들어 있었다. 양이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어느 작은 돌무덤이었다. 방신우가 아기를 묻었다고 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무너져 내린 돌멩이를 하나하나 올리던 양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문득 양이의 귓가에 박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양이의 눈물은 잦아들었다. 양이가 옷소매로 남은 눈물까지 훔쳐 냈다. 순간 양이의 두 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끝내 살아남는 것, 살아서 성공하는 것, 성공해서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 박씨가 못다 이룬 꿈,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장 강력한 후궁이 되리라. 나의 힘으로 불쌍한 고려인들을 보살펴 주리라. 그것만이 가장 큰 복수가 될 것이다.…


    인근의 객관에서 양이는 뜨거운 물로 목욕을 했다. 묵은 때를 벗겨 내고, 곱게 화장을 했다. 새로 산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양이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양이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백안은 의아해 했다. 탈탈과 백안 앞에 다시 선 양이는 참으로 고왔다. 두 사람에게 절을 올린 양이가 다부지게 입을 열었다.

    "곧 황제의 후궁 경선이 있을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나으리께서 절 도와주십시오…."
    "무어라?"

    "대신들이 자신의 여식이나 친척들을 추천하면 그들 중에 경합을 벌이게 될 터, 그러니 나으리께서 저를 추천해 주십시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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