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혼자 있는 시간이 나를 만든다

저   자
래띠 (지은이)
출판사
필름(Feelm)
출판일
2024년 02월







  • 유튜버 래띠의 첫 번째 책으로, 진정한 나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 나만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담고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통해 많은 이들과 소통하며,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나를 만든다


    08:00AM

    쉬지 않고 일하는 ‘갓생’은 행복할까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아닐까?’


    얼마 전까지는 ‘욜로(YOLO)’라는 단어가 유행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갓생(GOD-生)’이 유행인가 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으로 타인의 삶을 손쉽게 엿볼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 맞춰 삶을 사는 형태를 바꾸려는 이들의 시도를 매일 전해 듣는다. 삶을 사는 방식이 유행한다는 건 언제나 신선하다.


    나는 지난 4년간 거의 휴가도 가지 않은 채 일만 했다. 회사를 다니며 퇴근 후에는 유튜브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하며 편집했고, 주말에는 쇼핑몰 운영에 시간을 투자했다. 평일에 다하지 못한 유튜브 업무는 자연스럽게 주말로 이어졌다. 유튜브 영상 하나를 기획하는 데 하루에서 이틀이 걸렸고, 영상 촬영은 24시간, 편집은 족히 4일은 걸렸다.


    “노동은 매일을 풍부하게 하며 휴식은 피곤한 나날을 더욱 값지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 후의 휴식은 높은 환희 속에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명언이다. 이러한 명언을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식쯤이야,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것 중 하나니까 잠시 미뤄두자’라는 오만함을 부렸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젊음이라는 무기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갓생이 유행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삶을 전반적으로 훑어봤을 때 쉬지 않고 일할 타이밍이라 여겼다(물론 갓생이라는 단어는 그 후에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바쁘게 사는 삶을 굳이 앞세워 자랑하거나 본보기로 여겨달라고 말하기 민망한 이유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일하며 쉬지 않는 삶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4년을 휴식 없이 일에 삶을 쏟아부은 결과 행복과 여유에 대한 감흥은 점차 사라져갔다. 내가 쏟아부을 수 있는 노력의 한계와 연료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잠시 멈춰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계속 앞서가는 듯한 불안감을 견디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퇴근하고 영어를 배우는 직장인, 본업 말고도 소일거리로 투잡 혹은 쓰리잡을 하는 사람, 파워블로거로 주말에도 바쁜 지인, 어린 나이임에도 사업에 성공해서 큰돈을 벌기 시작한 사람, 빽빽한 스케줄러를 자랑하는 사람 등 도처에 이러한 사람들만 보이니, 어떻게 감히 쉴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내 멘탈을 챙기지 못했다. 심리검사를 받을 때면 늘 모든 수치가 건강하게 나왔기 때문에 내 정신 건강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멘탈이 강한 편이라, 웬만한 스트레스도 결국 해결책을 찾고 부딪히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노동에 나의 모든 것을 갈아 넣는 행위 속에 시간과 체력은 금방 고갈됐다. 시간과 체력은 한정적이고 삶을 한쪽으로 쏟아부으면 자연스럽게 균형이 무너진다는 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바쁨을 등에 진 탓에 친구들이 나에게 시간을 맞춰주기 일쑤였고, 날카롭게 선 예민함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분명히 무언가에 몰두하면 결과는 나온다. 그것이 항상 긍정적이라고 자부할 순 없지만, 내가 집중하는 만큼 그리고 노력하는 만큼 그 결괏값은 긍정의 수치로 올라간다. 그래서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처음 50의 성과에 200만큼의 행복을 느꼈다면 그다음에는 100의 성과로 100의 행복을, 그다음에는 200의 성과로 50의 행복을 느끼게 된다. 유명인들이 마약과 도박에 빠져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뉴스 기사를 볼 때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어떤 이유든 마약과 도박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뭘 그토록 찾아 헤맨 건지에 대해서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한마디로 성취감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복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취감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도 행복감을 취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가정이든 취미든 봉사든 휴식이든, 그 무엇이 됐든 다양한 카테고리의 행복을 삶에 채워 넣어야 한다.


    다양한 생각은 정원에 씨앗을 뿌리듯이 나를 풍요롭게 만들지만,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해버리면 썩어버린다. 어떠한 문제는 수학 공식과도 같아서 몰두하면 정답을 찾을 수 있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진 채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봐야 비로소 정답이 보이는 문제도 있다. 휴식은 삶의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명쾌한 해답이 될 수 있다. 인생은 길기 때문에 결국 오랫동안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지금 당장 앞만 보고 달려간다면 올바른 길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간조차 잃어버린다.


    하루하루를 노력하며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휴식’이라는 단어를 언젠간 취하고 싶은 갈망이 아닌, 내 삶의 균형을 맞춰주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여 쉬는 행위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행복의 종류는 분명 다양하다. 단순히 어떠한 성과를 냈을 때만 느끼는 행복감은 일부분일 뿐이다. 충분히 숙면했을 때도 우린 행복감을 느끼고, 좋은 영화나 글을 읽었을 때도 우린 행복감을 느낀다. 이 모든 행복감은 모두 종류가 달라서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하듯 다양한 행복을 느껴야 삶이 조화롭다.



    15:00PM

    불편한 인연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동네 어르신들의 중매로 만나 20살이 되기 전부터 돌아가신 날까지 함께했다. 그 시절 ‘인연’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아마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20살이 되기도 전에 생판 본 적 없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운이 좋다면 그 상대를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다면 평생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인연이라는 의미는 이렇게 나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관점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식을 올린단 말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많이 바뀐 만큼 인연이라는 의미 또한 사뭇 달라졌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관계가 과연 나에게 인연이 될 수 있을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관계로 인해 상처받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 관계에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혹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관계가 회복될 수나 있을지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답을 갈구한다. 이러한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한 번 맺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대하고 끝까지 책임지라는 옛날이야기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 삶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 관계를 유동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방식의 관계가 생겨났다. ‘썸’이라고 부르는 관계는 연인이 되기 전, 데이트를 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관계를 의미하고, ‘리바운드’라고 부르는 관계는 깊은 관계가 끝난 후 그 관계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되돌아가기 위해서 또 다른 이성과 맺는 새로운 관계를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실연의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시 다른 이성과 데이트하는 것 또한 어떻게 보면 리바운드 관계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 더 진지한 관계로 발전하든지 혹은 가벼운 데이트에서 끝이 나든지 모두 당신의 선택에 달렸다.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누군가는 진정한 관계의 의미에 필수 조건으로 희생을 들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다른 필수 조건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손절’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사용되었다. 누군가는 100의 노력을 기울여서 인연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20의 노력도 버거울 수 있다. 누군가는 희생 그 자체가 인연의 중요한 요소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람에게 인연을 소중히 하라는 이야기는 지혜로운 해답이 아니라 강요가 될 수 있다. ‘과연 이렇게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관계를 이어 가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200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개선점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삶을 희생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거야.”라는 이야기 또한 조언이 될 수 없다. 삶이 불행해지는 경험을 겪어가며 관계에 의문을 갖는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은 오히려 인연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아도 된다는 말뿐이다.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인연에 헌신해야 하는 시절은 이미 끝났다. 인연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해졌다.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관계의 양식이 생겨나는 이유 또한 우리가 더욱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삶을 더 행복하게 누리기 위해서 변화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만남에 대한 중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헤어짐에 대한 중요성은 잘 알지 못한다.


    나에게 관계란,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무언가를 주고받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따뜻함을 안겨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관계고 그들과의 관계가 나에게는 곧 인연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자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나의 에너지와 마음을 쓰고 서로의 삶을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23:00PM

    나만의 시간

    처음 ‘나만의 시간’이라는 문장을 접했을 때 굉장히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다. 그 문장이 왜 나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아마 홀로 보내는 시간 자체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이 정해진 시간을 부여받는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더 가지려 애쓰지 않아도 시간은 언제나 공평하다. 맨날 만나는 사람들이 귀하다고 여겨지지 않고, 맨날 먹을 수 있는 밥이 귀하다고 여겨지지 않듯이 매일 매일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시간을 딱히 귀하다고 여기기 힘들다.


    이러한 나태한 마음으로 삶을 조금씩 낭비하더라도 우리는 내일 다시금 공평하게 시간을 가진다. 낭비에 대한 죄책감은 쉽게 잊힌다. 뉴스에서 큰 사고가 일어나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해도 그 사람의 시간이 끝났을 뿐이지, 내 시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매일 주어지는 오늘이 그다지 귀하지 않듯 내일도 당연하게 주어질 것이다.


    음대를 다니던 대학 시절, 순전히 호기심으로 수강한 철학 교수님의 수업이 하나 있었는데, 이 수업을 듣는 내내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학문은 그리스어 ‘philosophia’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사랑하는’ 혹은 ‘좋아하는’이라는 뜻의 접두사이고, ‘sophia’는 말 그대로 ‘지혜’라는 뜻을 가졌다.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막연히 어렵기만 했던 학문인 철학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삶과 아주 가까이 닿아있었다. 철학 수업 첫 시간 때 교수님의 해주신 첫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혼자서 보내는 그 시간이 나를 만듭니다.”


    즉 타인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오로지 나 혼자 보내는 그 시간이 온전히 나를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 지난 삶을 검열하는 순간이었다.


    방 한구석에서 나 홀로 보낸 수많은 시간들이 딱히 자랑스럽지 않았다.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나를 만든다면,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은 결국 지난날의 내가 만든 것이다. 현재에 대한 모든 불만족이 숙연하게 수그러들었다. 내가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나를 대하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내 하루를 별 가치 없이 여기는 태도는 결국 나 스스로를 별 가치 없이 대하는 것과 동일하다. 이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시간의 귀중함을 느꼈다.


    철학 수업 이후로 최대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개인 시간을 지키려 노력했고, 그 시간을 막연히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는 습관을 들였다. 이는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그냥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만들어낸 산물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습관이 생겼는데, 내가 내일 당장 죽는다면 그동안의 삶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만족스러워할지 종종 상상하곤 했다. 아마도 삶의 귀중함을 깨닫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매일 주어지는 그 시간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자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젊은 날 내가 취하는 즐거움은 삶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젊음이 주는 삶의 이점에 깊게 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젊음을 향유하는 행위가 모두 배제된 시간 속에서 나의 내면을 위해 온전히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고민한다. 그러면 비로소 나의 내면이 보인다. 어떤 외모의 변화가 나를 찾아와도 삶을 멋지고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태도를 유지하고 싶다. 이것은 온전히 나의 내면에 달렸고, 그 내면은 젊음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 내 시간도 결국 언젠가는 바닥을 보이며 삶이 끝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몇 명이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을까?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중 일부분일 뿐인 오늘 하루가 빨리 끝나버리길 기다리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가끔 현재가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낼지 알면서도 모른 척 살아가고 있기도 한다. 지금 마시는 술은 내일 출근하는 내 몫이고, 지금 누리는 게으름의 몫은 내일의 내가 짊어질 것이며,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여도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한 달 뒤의 내가 책임지겠지 하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시간은 곧 삶이다. 내가 시간을 대하는 그 태도는 곧 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되고, 결국 나 자신이 된다. 그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외로운 마음 위로하기

    하늘이 우중충하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누구라도 울적한 마음과 외로움을 평소보다 크게 느낄 수 있다. 반복되는 부정적인 상황들 속에서 자신에게 침잠되는 일 또한 외로움을 동반한다. 또한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아 성찰의 시간 또한 쓸쓸하고 외롭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외로움 속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순간, 내 삶이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이러한 기분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감정이고, 대부분은 그러한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속인다. 일부러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시끄러운 소음 속에 본인의 외로움을 외면해버린다든가, 내 감정의 형태와는 전혀 상반되는 음악을 들으며 사실을 외면한다. 혹은 조용히 본인의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감정을 자책하고 비난한다. 남들보다 외로움 혹은 슬픔과 같은 감정을 지나치게 느끼는 것은 일상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스스로를 소외되게 만들 뿐이라는 생각에 더욱더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거나 비난한다. 이렇게 우리는 감정의 본질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으며, 대체로 그 감정이 부정적이면 부정적일수록 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하며, 그것만이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스스로의 부정적인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외면하려 할수록 그 감정은 더 큰 폭발력을 가진다. 매일 저녁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공허함이 밀려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직시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종종 동생과 나를 놀이공원에 데려가 주셨다. 놀이공원은 해가 지면 구석구석 아름다운 불빛을 환하게 밝히며 더욱더 황홀한 장소로 바뀌었다. 추운 날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아름다운 불빛은 그 자체로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저녁 무렵에는 늘 집에 돌아갈 채비를 했는데, 그 어린 나이에 놀이공원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었다. 분명히 또다시 올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놀이공원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슬펐다. 어떤 사람은 그날 하루 느꼈던 행복감에 집중했다면, 나는 떠나야 한다는 슬픔에 본능적으로 집중했던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서 떠날 때마다 느껴졌던 슬픔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었다. 나의 슬픔의 원인을 찾으려고 해봤자 스스로가 연약하게 느껴질 뿐이기 때문이었고 그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슬픔은 내 성격의 일부분이고 내가 그러한 깊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행복이라는 감정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행복보다는 슬픔이나 외로움 혹은 미련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각자의 성격이 모두 다른 만큼 우리는 서로 다른 감수성을 지녔다. 그러나 대부분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보편적인 이미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 나의 자아를 마주 보는 일은 점점 두려운 일이 되어버린다. 감정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문제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서 놀이공원을 떠날 때 한없이 슬퍼하던 나의 모습을 본 부모님께서 “다음에 또 올 건데, 왜 유난이야?”라는 말을 했다면, 나는 절대로 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스로를 억압하며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다. 이러한 작은 트라우마들이 쌓여 결국 점점 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형태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있는 그대로의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결국 스스로가 누군지조차 점점 잊어간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누군가가 나서서 이해해 주지 않을뿐더러, 내가 솔직하게 표현한다고 해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부모도 마찬가지고 사랑하는 연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


    우리가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마주하는 일은 생각보다 내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은 해결해 준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외면한 채 외부에서 해결점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똑바로 직시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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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