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

저   자
강인숙 (지은이)
출판사
열림원
출판일
2023년 11월







  • 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에서 바르셀로나 까사밀라까지 이어령의 동갑내기 부인 강인숙과 세 자매의 스페인 여행기를 담았습니다. 생생한 감성과 여행지의 특성과 역사, 종교, 문화, 정신 등을 파악하는 통찰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함께 웃고, 배우고, 사랑하고


    꿈속의 여행지 스페인과의 만남

    “우와따따뿌뻬이”

    정년 퇴임을 한 후 나는 제철에 여행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교직에 있는 사람은 평생 제철에 여행을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방학 이외에는 여행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50대가 넘으니 아이 들이 떠나기 시작해서 1년에 한 번쯤은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한여름이나 엄동설한이 아니면 여행을 할 수 없어, 무더위가 아니면 추위 속에서 낯선 곳을 헤매 다녀야 했다. 그래서 정년퇴직할 때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다행히도 우리 부부는 동갑이라 정년을 맞는 시기가 같아서 제철에 원하던 곳에 가는 것이 가능했다. 튀르키예와 이집트, 러시아, 인도, 메소포타미아, 유럽과 그리스…… 가고 싶은 곳은 너무 많았지만, 제1지망의 행선지가 스페인으로 결정되었다. 거기에는 동양과 서양이,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혼합하여 만들어낸 독특한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정표를 짜고 있었는데, 같은 해에 퇴임하기로 되어 있던 남편이 석좌교수가 되어 강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여행에 제동이 걸렸다. 맡은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휴일을 안배하고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한다 해도 휴강이 불가피해서 그는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작은언니가 자기와 같이 가자고 제안해왔다. 칠순이 되었는데, 형부가 돌아가셔서 잔치를 마다했더니 아이들이 그냥 보내는 건 너무 섭섭하니까 이모와 스페인에 갔다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동생도 따라붙었다. 올림픽 때 바르셀로나에 너무 가고 싶었는데 동행이 없어 못 간 동생은, 워낙 스페인을 좋아해서 몸이 불편한데도 앞장을 서서 설친다. 교회의 여선교회 책임을 맡고 있던 큰언니도 선뜻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그 무렵에 마침 임기가 끝나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딸의 결혼식이 임박한 막내만 빼고 네 자매의 스페인 여행은 이렇게 하여 일사천리로 결정되었다. 네 사람의 여건이 합치되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형제들은 남편 다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행 파트너다. 그들과 여행을 하면 남편과 여행할 때처럼 편안한 여행은 할 수 없다. 개성이 강한 여자들이 여럿이 모이니까 취향이 다른 데서 오는 마찰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남과 여행할 때처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늘 언니들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다행히도 우리 형제는 모두 역마살이 끼어 있어서 여행을 너무 좋아한다. 함께 신명이 나 있으니 분위기가 고조되고 상승하는 것이다. 게다가 넷이라는 숫자는 같이 여행하기에 얼마나 적합한 숫자인가? 택시 탈 때도 좋고, 버스를 탈 때나 방을 정할 때 짝이 맞아서 아주 편리하다. 만사가 형통한 셈이다.


    그 무렵에 세 살이었던 막내손녀는 아주 많이 신이 나면 “우와따따뿌뻬이!” 하는 국적 불명의 감탄사를 외치는 버릇이 있었다. 여행이 결정되자 우리도 그 애를 본 따서 “우와따따뿌뻬이!”를 합창했다. 여건이 척척 들어맞아서 이렇게 여러 자매가 함께 여행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가서도 우리는 신나는 것만 보면 “우와따따뿌뻬이!”를 외쳐댔다. 우리는 집만 떠나면 수학여행 간 여학생들처럼 신이 나고 즐거워지는 타입이니까 “우와따따뿌뻬이!”를 합창할 기회는 아주 많았다.


    우리는 두 살이나 세 살 터울로 연이어 태어난 다섯 자매여서 자랄 때 친구가 필요 없었다. 형제는 하늘이 내려준 고마운 친구라고 할 수 있는데, 숫자가 다섯이나 되니 아쉬운 것이 없었다. 우리는 빈 성터에 있는 외딴집에서 우리끼리만 놀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만약 그때 저들이 없었더라면 내 유년의 시간들이 얼마나 삭막하고 지루했을까? 그런데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미국과 한국으로 갈라져서 서로 자주 볼 수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싸우면 어머니는 언제나 “무 꼬리나 한데서 썩지 사람 새끼는 한데서 썩는 게 아니”라는 경고를 했다. 여자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서 서로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 관계임을 예견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예언대로 우리는 지금 너무나 먼 곳에 떨어져 살아서, 몇 년씩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만다. 시차가 일곱 시간이나 되는 다른 대륙으로 그들이 모두 가버려서 한국에 혼자 남은 나는 외딸처럼 늘 외롭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축복으로 여겨진다. 내가 어쩌다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지금도 우리는 한 방에 모여 같이 잔다. 어렸을 때처럼 의견 충돌도 생겨 말다툼도 하면서, 같이 웃고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엉켜서 같이 자는 것이다. 하지만 같이 해외여행을 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다섯 사람의 여건이 순탄하게 맞아서 함께 외국을 여행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꿈이었다. 모두가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처럼 같이 여행을 하면서 “우와따따뿌뻬이!”가 자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쪼꼬만 계집애가 뭘 안다고 까불어!

    나는 언제나 여행할 때 오랫동안 자료를 조사해서 직접 일정표를 짜는 버릇이 있다. 행선지와 일정을 먼저 정하고 나서, 관광버스를 타기 쉬운 구역에 경비에 맞는 호텔을 여행사에 부탁하면 예약을 해 준다. 관광 코스는 현지의 호텔에 가서 결정하면 된다. 어느 나라 호텔이든 관광 프로그램이 잘 짜여진 안내 팸플릿이 비치되어 있으니까 그중에서 고르면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일정을 짜가지고 마드리드에서 만나자고 전화했더니 조카가 반대하더란다. 스페인은 치안 상태가 좋지 않은데,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동양의 할머니들이 몰려다니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니 여행사에 맡기라는 것이다.


    완전히 노파 취급을 당하는 기분이어서 좀 언짢았지만, 곰곰이 따져보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제일 아래인 동생이 예순넷이고 큰언니는 일흔둘이니 우리는 모두 영락없는 노파들이다. 게다가 말이 안 통한다. 작은언니가 은퇴한 후에 스페인어를 조금 배웠을 뿐, 나머지는 정말 말도 할 줄 모르는 ‘동양의 노파들’이다. 더구나 근육무력증을 앓은 일이 있는 동생은 많이 걷는 일이 어렵고, 나도 허리 디스크를 앓는 처지이며, 작은언니는 백내장과 망막 수술을 연거푸 받아 운전 면허증을 빼앗긴 상태다. 까불 생각을 하지 않고 순순히 조카 말을 듣기로 했다.


    언니가 미국에서 여행사를 알아보았다. 좀 비싼 편이지만 우리만을 위해 벤츠사의 9인승 밴을 제공하고 한국인 가이드가 딸린다는 조건으로, 마드리드- 세고비아-톨레도 - 코르도바 - 세비야 - 지브롤터- 토레몰리노스 말라가 - 그라나다 - 바르셀로나를 거쳐 파리에서 돌아오는 11일간의 상품이 있다고 해서 그걸로 결정했다고 통보해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드리드까지 일곱 시간밖에 안 걸린다는 언니의 말에 내가 마드리드로 직접 가지 않고, 딸도 만날 겸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같이 떠나기로 한 것인데, 막상 가보니 뉴욕까지 가서 떠난다는 엄청난 조건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요추 디스크가 삐져나와 3년 동안이나 비행기 타는 것을 금지당했던 나는, 겨우 회복한 건강을 다시 잃을까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 문제 때문에 비행시간을 몇 번이나 체크했는데, 예정보다 다섯 시간이나 비행시간이 늘어났으니 기가 막혔다. 뿐 아니다. 기차로 이동하는 편이 허리에 좋고 시간도 절약된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언니는 모두 자동차 여행으로 짜놓았으니 불안한 일정이다.


    “비행기를 오래 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데, 뭘 하고 있다가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냐”라고 내가 언니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자 혼자서 일을 처리하느라고 전화료도 엄청났고, 고생도 많이 한 언니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런데 내뱉은 대사가 걸작이다.


    “쪼꼬만 계집애가 뭘 안다고 까불어!”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이 폭소를 터뜨렸다. 내게 ‘쪼꼬만 계집애’ 시절이 있었다는 게 영 상상이 되지 않는 그 애는, 이모가 정년퇴직한 자기 엄마를 ‘쪼꼬만 계집애’라고 하니까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다. 그 애의 푸짐한 웃음이 우리에게도 전염됐다. 지구여행사 건물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막내와 딸을 합친 여섯 여자가 배를 잡고 맴을 돌면서 정신없이 웃어댔다. 그 웃음이 우리를 소녀 시절로 데려갔다.


    우리는 맨날 그렇게 웃으면서 자라났다. 언제나 야단을 맞을 때까지 자지 않고 킬킬댔다. 6·25 동란 때, 등화관제의 어둠 속에서도 그렇게 웃고 까불어서 밤마다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다. 계집애가 여섯이나 되니 웃음소리도 컸다. 일을 잘못 처리해서 할 말이 없자 다급한 김에 옛날에 하던 욕을 내뱉기는 했지만, 내 허리가 염려스러워서 잔뜩 캥겨 있던 작은언니도 그 웃음 덕에 기력을 회복했다.


    “봐! 이렇게 웃으며 다니문 엔도르핀이 막 생겨 병 같은 거 안 난단 말이야!”


    백치기로 시작된 스페인과의 만남

    10월 8일 아침 9시 50분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델타항공 106기는 뉴욕에 저녁 6시 50분에 도착했다가, 8시 10분에 떠나 9일 아침 9시 20분에 마드리드에 착륙했다. 도합 열두 시간의 비행 여정인데,

    시차 때문에 24시간이 지난 셈이 되어 지친 상태로 다음 날 아침에 마드리드에 닿은 것이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지루한 줄 몰랐지만, 밤을 새우고 여행한 셈이다. 로스앤젤레스는 지금 저녁 아홉 시니 모두 졸립고 피곤했다.


    공항에는 지구여행사 직원과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가이드는 서글서글하게 생긴 30대의 자그마한 남자로, 마드리드대학 학생이라 한다. 그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차는 약속된 9인승 벤츠가 아니라 7인승 르노였다. 그가 우리를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은 아토차역 부근에 있는 푸에르타 데 톨레도 호텔이다. 호텔은 톨레도 방향으로 가는 시계를 나타내는 톨레도 문 바로 앞에 있는 고풍의 건물이었다.


    가이드가 빨리 나오라고 독촉을 했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을 보고 한국 식당에 가려면 시간이 늦는단다. 식당에서는 단체 손님을 할인해주는 대신 손님이 적은 시간대에 배정하는 모양이다. 모든 문제는 그의 독촉에서 시작되었다. 피곤한데다가 낯선 도시에 나설 준비를 서두르다보니 생각이 균형을 잃었다. 날씨가 좀 쌀쌀해서 스웨터를 겹쳐 입고 바삐 나오려니까 작은언니가 갑자기 불안한 얼굴을 한다. 호텔에서 여권이나 패물이 없어지는 일이 더러 있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사람이나 나라나 신용을 얻지 못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 스페인의 치안이 불안하다니까 매사가 미심쩍어지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그 호텔에는 금고도 있었는데, 챙겨볼 시간이 없으니까 언니는 돈과 여권과 패물이 든 백팩을 메고 나서기로 결정했다. 그 불안이 전염되어 나도 얼떨결에 돈과 여권이 든 백을 그대로 들고 나왔다. 차에 두고 내릴 작정을 한 건데, 막상 두고 내리려니까 가이드가 질색을 한다. 차 속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귀중품까지 든 백을 들고 관광에 나서는 이상한 짓을 하게 되었다.


    프라도 미술관에 갔더니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을 서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무료라서 사람이 많단다. 할 수 없이 우리는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가의 방대한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는 유명한 미술관의 관람을 포기했다. 그 대신 레티로 공원을 돌아 마드리드 시내를 드라이브하다가 길가에 있는 고풍한 성당에 들러 결혼식 하는 것을 구경했다.


    식사 후에 처음으로 간 곳은 에스파냐 광장이다. 1930년에 완성되었다는 높은 빌딩이 있었다. 도심지여서 현대 건물만 보이는 광장 안에 산초 판사를 거느린 돈키호테의 검은 기마상이 놓여 있다.


    매부리코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시커먼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 근처에 식구들을 폼 잡게 하고 나는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독사진까지 다 찍어주고 나서 왕궁으로 이동했다. 주차 시설이 미비해서 차를 세우느라고 법석을 떨다보니 왕궁에서 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게 되어 한참을 걸었다.


    마드리드 왕궁(Palacio Real)은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 문화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1734년의 화재로 합스부르크가가 세운 궁전이 타버린 자리에 펠리페 5세와 왕비 이사벨 데 파르네시오가 짓기 시작한 이 궁이 없어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알람브라 궁전은 거창하지도 않고 호화롭지도 않았지만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해내서 마드리드 왕궁보다 보기 좋았다. 단체 관람이 원칙이어서 공인되지 않은 우리의 가이드는 설명을 해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거지처럼 남의 가이드 뒤를 따라다니며 귀동냥을 하다가 너무 피곤해서 왕관이 디자인된 열쇠고리를 사가지고 왕궁에서 나왔다.


    왕궁을 나오자마자 나는 백치기를 당했다. 마드리드에 온 지 두 시간도 채 못 돼서 가진 것을 몽땅 도둑맞은 것이다. 날이 더워지길래 스웨터를 벗어 백에 넣으면서 “내 백에는 옷도 들어간다구요” 하고 동대문 시장에서 산 큰 핸드백을 자랑한 지 10분도 못 되어서였다.


    동생이 걷기 힘들어하자 가이드가 차를 가지고 올 테니 길을 건너 네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라고 했다. 왕궁을 구경하느라고 피곤해진 일행이 길모퉁이에 쭈그려 앉는 걸 보고 나는 그 앞에 있는 안내판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있는 위치를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다.


    느긋하게 시내 지도를 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확 잡아채서 땅에 패대기를 쳤다. 어깨에 멘 백을 지키려고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모으는데 팔에서 으지직 소리가 나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백이 강탈당했다. 감색 티셔츠를 입은 자그마한 청년이 그걸 들고 잽싸게 대기 중인 오토바이에 뛰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관광객들과 언니들이 달라붙어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었지만, 그들은 확 속력을 내서 그 손들을 털어버렸다. 쾌속정처럼 삽상하게 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우리는 넋이 빠진 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청명한 날씨였다. 습기가 없는 곳이라 청명하다기보다는 차라리 투명하다고 해야 옳을 만큼 끝내주는 날씨였다.


    그 재난은, 스페인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다시는 관광하러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만큼 큰 충격을 주었다. 하늘이 너무나 청명하고 아름다워서 내가 당한 재난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건 엄연한 현실이어서 여행지에서의 금쪽같은 한나절을 그 치다꺼리로 다 보내느라고 우리는 캄포 델 모로와 마요르 광장에 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정말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는데 그립지 않은 사람만 찾아다니느라고 하루가 다 갔다. 귀국해서도 여권을 새로 내러 뛰어다녀야 했고, 비용도 16만 원이나 들었으며, 여행자수표 찾기, 크레디트카드 만들기 등에도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시간만 빼앗긴 것이 아니다. 팔에 금이 가서 거의 1년 가까이 통증에 시달렸다. 그렇게 재난은 예고 없이 와서 우리 모두를 묵사발을 만들고, 길고 괴로운 후유증을 남긴다.


    없는 자의 자유

    그런데 막상 가진 것을 다 잃고 나니 뜻밖에도 여행이 편해졌다. 여행 경비는 다 지불된 상태였고, 프랑화와 비상금 200불은 두고 나갔기 때문에 언니에게서 열쇠고리 살 돈만 얻어 쓰면 급한 문제는 해결되었다. 동생이 플라멩코 값을 내주면 작은언니가 마차 값을 내고, 큰언니가 가이드의 팁을 내주는 식이어서 돈이 별로 필요 없었다. 그 신세는 프랑스에 가서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새 카메라가 아깝기는 했지만, 당장 내가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되는 것은 차라리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눈도 나쁘고 기계도 잘 못 만지는 나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죽으면 사진 처리할 일이 걱정이라면서 언니들도 별로 찍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꼭 필요할 때는 사진 공부를 한 일이 있는 작은언니가 찍어 주니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백이 없으니 손이 가벼운 것도 좋은 일이었다. 점퍼 주머니에 루주와 손수건을 넣고 새끼 주머니에 50불짜리 하나만 간수하고 다니니 간편했고, 약이 떨어진 줄 알고 그러는지 병도 나지 않았다. 수첩을 잃은 덕에 파리에 가서 사람 만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어진 것도 괜찮은 일이었고, 선물을 살 돈이 없으니 쇼핑 부담이 준 것도 나쁘지 않았다.


    캄포 델 모로를 보지 못해서 마드리드 왕궁에는 정원이 없는 것 같은 고정관념이 생긴 것은 큰 손실이지만, 그 대신 예정에 없던 거리를 많이 드라이브했고, 지하철도 타보았으며, 경찰서, 대사관 등에도 가보았으니, 그것도 일종의 관광이라 할 수 있다. 뿐 아니다. 첫날을 푹 쉬어 모두 시차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세상에 보상이 전혀 없는 불행은 없는 것 같다. 그 재난은 우리에게 다시는 백치기 같은 것은 당하지 않을 만한 정신 무장을 시켜서 무사히 스페인 여행을 마치게 해주었다. 다시는 여행 중에 남의 돈을 맡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도 귀중한 교훈이었다고 할 수 있다.


    Aseo problem

    우리 자매는 어머니를 닮아 모두 방광이 약한 데다가 늙기까지 한 여자가 넷이나 모였으니 가는 곳마다 화장실이 문제여서,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스페인어가 ‘aseo’였다. 스페인어로 화장실은 ‘bano’ ‘servicios’ ‘aseo’ 등 여러 개가 있지만, ‘aseo’가 가장 잘 통했다. 다행히도 스페인 사람들은 화장실 인심이 후했다. 어느 가게 앞에서나 ‘aseo’ 하면 얼른 손을 들어 가리켜준다. 상인 문화의 전통이 있는 나라여서 상점 주인들은 손님이 화장실을 쓰면 미안해서 물건도 사게 된다는 것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대사관처럼 상점이 아닌 곳의 ‘aseo problem’이다. 안에 있는 동안 나는 내내 큰언니의 화장실 문제가 걱정되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나와보니 언니는 그 문제를 잘 처리하고 있었다. 요술 지팡이가 없어도 노파들은 누구나 요술쟁이가 되는 것일까? 어떤 소녀가 60이 지난 여자들을 ‘불가능이 없는 세대’라고 불렀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무 데서나 졸고, 아무 데서나 주저앉고, 아무 데서나 배설하는 것을 놀리는 말이다. 큰언니는 70이 지났으니 더욱 불가능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스페인의 화장실은 관광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안을 치장한 채색 타일이 개성적이어서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채색 타일이 종류도 다양해서, 색채감각이 발달한 이슬람 문화권의 한 면을 보여준다. 화장실에 가려면 안뜰도 지나야 하는데, 스페인에서는 건물의 안뜰(patio)이 또 대단히 아름답다.


    겨울이 춥지 않아 얼어 터지지 않아서일까. 건물 외벽의 타일들도 윤기가 흐르고, 손상된 것이 별로 없었다. 과달키비르강 근처의 마을에서는 여염집의 파티오들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지나가다 발을 멈추고 염치없이 들여다본 일이 여러 번 있다.


    톨레도에서부터 채색 타일의 미학이 발휘되더니 안달루시아에서는 그 극치를 보여주었다. 무슬림 스페인의 문화적 정점을 이룩한 알안달루스······ 피카소, 미로, 가우디 같은 색채의 마술사들이 이 지방에서 배출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유대인 거리에서는 건물 창틀에 장식한 꽃을 구경하는 재미가 곁들여졌다. 체포하러 오는 차가 못 들어오게 하려고 일부러 좁게 만들었다는 유대인 거리의 골목에서, 우리가 탄 덩치 큰 9인승 밴은 진퇴

    양난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 정체 상태가 우리에게 거리의 아름다운 집들을 감상할 기회를 넉넉히 주었다. 코르도바의 유대인 거리는 오렌지빛 스페인 기와에 벽은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어, 그 자체가 남국의 태양 아래에서 빛을 뿜고 있었다. 그런데다가 창틀마다 놓여 있는 붉은 꽃들이 레이스처럼 흰 벽을 치장해서, 오래된 도시의 침체된 분위기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스페인의 또 하나의 왕국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제가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오죽하면, 60이 지나면 배운 여자나 안 배운 여자나 같아지고, 80이 지나면 산 여자나 죽은 여자나 다 같아진다는 익살맞은 우스갯말이 유행하고 있겠는가. 하지만 바르셀로나에 가면 남들과 아주 다르게 산, 희한한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토니 가우디 때문이다. 그는 혼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있어왔던 오래된 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스카이라인 뿐 아니다. 공원과 빌라와 수도원과 굴뚝 같은 것의 패러다임도 휘저어놓았다.


    나는 거대한 갈색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구엘 공원 입구에 있는, 도자기 파편의 모자이크로 만든 거대한 도마뱀도 마찬 가지다.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한 고전적 미학을 좋아하는 나는 가우디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구식이다. 하지만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지배하던 거리의 구석구석에 그가 저질러놓은 장난들이 얼마나 그 낡은 도시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목격하니 부러운 생각이 앞섰다.


    이 세상에는 세계의 판도를 확 바꾸어 놓은 놀라운 정복자들도 많고, 교향곡을 아홉 개나 남긴 음악가도 있지만, 한 도시에 이런 엄청난 가시적 변화를 일으킨 건축가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가우디는 네모나야 한다는 집의 개념을 파기하여, 건물 전체가 파도처럼 물결치는 집을 도심 한복판에 지어놓았다. 6층짜리 아파트 까사밀라다. 건물에서 ‘모서리를 없애야 한다’는 그의 집념이 까사밀라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난간이 없는 그 건물의 옥상에, 가우디는 <가면 속의 아리아>에 나오는 오페라 가수 같은 형형색색의 인물을 조형한 굴뚝들을 세워놓았다. 굴뚝들은 너무나 표정이 풍부해서, 까사밀라의 옥상은 마치 가면극 무대 같다.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았으면서도 인간답지 않은 그 굴뚝의 인물 형상을 제일 좋아한다.


    교통사고로 죽긴 했지만 그는 참 운이 좋은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도록 소리 없이 뒷받침해주는 구엘 백작 같은 부유하고 이해심 많은 후원자를 가졌고, 어떤 변형 건물을 지어도 용납해주는 너그러운 정부를 가졌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가 그의 전시장 같은 거리에 서니, 안토니 가우디를 제일 좋아한다던 아이 생각이 났고, 그 뒤를 이어 자기가 만약 서울 시장이 되면 미치고 말 거라던 남편 생각이 났다. 뜯어고치고 싶은 간판들과 다시 짓고 싶은 집들이 너무 많은데 마음대로 할 권한은 없으니 미칠 거라는 이야기다. 그에게도 구엘 백작 같은 사람이 나타나주었으면 좋겠다.


    뜻을 마음대로 펴지 못해 미치겠는 사람이 어찌 내 남편뿐이겠는가? 토머스 그레이의 말대로(『묘지에서 쓴 엘레지』) 세계의 모든 공동묘지에는 얼마나 많은 무명의 밀턴(Milton)과 무명의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묻혀 있을 것이며, 아무도 모르는 허허벌판에서 얼마나 많은 꽃들이 움트고 개화하여 그 진귀한 향기를 허공에 헛되이 흩어버리고 있을 것인가? 누구나 천재를 타고나는 것은 아니지만, 재능이 있다고 누구나 가우디처럼 마음 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가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얼마나 놀라운 곳이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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