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맹자에게 배우는 나를 지키며 사는 법

저   자
김월회
출판사
EBS BOOKS
출판일
2023년 02월
서   재







  • 고단한 세파를 온전히 감당해 낼 근기, 결여로부터 벗어나 진정 자유롭게 세상을 대하는 일, 나를 진정으로 성찰하는 힘, 시효가 없는 이 당당한 삶을 맹자로부터 배웁니다.



    맹자에게 배우는 나를 지키며 사는 법


    ‘홀로’일지라도 나아가는 삶

    인간다움, 인간답게 사는 길

    맹자는 사람은 언제든, 또 어디서든 누구나 착하게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 말은 사람은 누구나 악하게 태어난다고 보는 견해에 비해 한층 좋게 느껴진다. 문제는 현실에, 또 역사에 버젓이 살고 있고, 또 있어 왔던 악인들의 존재다. 모두가 착하게 태어났다면 대체 그 많은 악인은 다 어디서 왔냐는 물음에 답변이 궁색해지기 때문이다.


    사람, 하늘을 닮은 존재

    그래서인지 맹자의 견해는 현실에서 그다지 호응받지 못했다. 나중에 성리학이 등장하여 맹자가 공자에 버금가는 현인으로 추켜세워진 후에는 맹자의 견해가 정통으로 거듭났지만, 그전까지 맹자 사후 줄잡아 천수백여 년 동안은 맹자의 견해가 결코 주류적 견해는 아니었다. 그런데 맹자는 왜 사람은 누구나 다 착하게 태어난다고 확신했을까?


    바로 사람이 하늘을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맹자는 다른 존재와 달리 사람은 하늘로부터 선함을 부여받아 태어난다고 보았다. 사람의 본성은 다 선하다는 성선설을 제창한 근거다. 그러면 사람이 하늘의 선함을 타고났다는 건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맹자는 마음에 주목했다. 사람은 다른 존재와 달리 마음이라는 걸 지니고 있는데 “이 마음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기에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하늘이 부여한 선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여겼다. 이를테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선함을 마음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예를 들었다.


    이제 사람이 언뜻 아이가 우물에 빠질 것 같은 장면을 보면 모두가 깜짝 놀라며 측은해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이는 그 아이의 부모와 교유를 하고자 한 것도 아니고 고을의 벗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함도 아니며 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로 보건대, 측은해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하늘이 사람에게 선함을 부여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맹자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태어날 때 이미 배우지 않고서도 할 줄 아는 게 있고 알 줄 아는 게 있다고 보고는 이를 각각 ‘양능(良能)’과 ‘양지(良知)’라고 칭했다. 양은 단순히 ‘선량하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 한계를 초월해 있는, 이를테면 하나님의 선함과 같은 그러한 ‘절대적 선’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곧 그것은 양의 수식을 받는 지와 능이 하늘의 선함에 닿아 있음을 가리킨다. 사람이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것이 제법 있는데, 그중에서 하늘의 선함과 연결된 것이기에 양지, 양능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 아래 맹자는 사람은 모두가 착하게 태어난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거울은 닦으면 다시 맑아져

    여기 거울이 있다. 거울의 기능은 무언가가 거울 면에 비쳐지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되비추는 것이다. 거울 면에 먼지가 묻어 있다거나 때가 타면 되비추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그럴 때 깨끗하게 닦아 주면 거울은 제 기능을 되찾는다.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때가 덕지덕지 끼어 있어도 다시 잘 닦아 내기만 하면 거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사물을, 또 세상을 되비춘다.


    맹자가 말한 사람의 선한 본성도 거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거울 면을 깨끗하게 잘 보존하면 착하게 태어난 대로 착하게 살게 되고, 거울 면에 이물질이 껴서 흐려지거나 탁해지면 타고난 선한 본성이 그만 가려져 선하지 못하게 또는 악하게 살게 된다. 누구나 다 착하게 태어났음에도 선하지 않거나 악한 이가 존재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다.


    그러면 거울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맹자는 누구나 ‘불인지심’, 그러니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제대로 실천하면 된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남을 해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계속 키워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불인지심이라는 것도 무어 대단한 도덕심이 아니라, 가령 우물에 빠질 것 같은 아이를 보면 구해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마음이 불인지심이다. 이러한 마음을 키워 나가면 된다고 했음이니 악인이 선인이 되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렵지 않게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악한 사람 대 선한 로봇

    실제로 맹자는 평생을 착하게 살았던 듯하다.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좌고우면하지 않았고, 세상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꿋꿋하게 자기 뜻을 펼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매진했다. 권력, 재력 같은 세상 권세도, 부국강병 일변도의 시류도, 선한 사람, 선한 사회, 선한 국가라는 그의 신념을 꺾지 못한 셈이다. 그야말로 착하게 태어났으니 착하게 살리라는 의지의 일생이었다. 이러한 맹자의 삶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미래 사회를 다룬 SF 영화를 보면 휴머노이드, 그러니까 인간과 똑같은 로봇이 종종 등장한다. AI와 로봇 기술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겉만으로는 사람인지 휴머노이드인지가 분별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이 그려지곤 한다. 흥미로운 건 인간보다 휴머노이드가 더 선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선한 로봇과 악한 인간의 대립 구도가 SF의 단골 소재일 정도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허구 속의 일이지만 로봇에게 인간다움을 이식한 결과가 선한 로봇으로 상상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인간다움 하면 악함이 아니라 선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인간다움의 본질이 곧 선이라는 사유를 2,300년 전 사람인 맹자나 오늘날 사람이나 동일하게 한 셈이다.


    그러니 착하게 태어난 만큼 착하게 살리라는 지향은 그저 선하지 못한 현실을, 선보다는 주로 악이 더 행세하고 더 잘사는 현실을 도외시한 결과로만 보기는 어렵다. 세상 물정 모르고 융통성 없는 아둔함으로 볼 수는 더더욱 없다. 선함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는 믿음이 지난 수천여 년간 시대와 지역을 격하여, 봉건체제든 자본주의체제이든, 전근대문명이든 근대문명이든 공유되었다면 착하게 살리라는 지향은 가장 인간다운 지향의 표출에 다름없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답게 살리라는 지향과 동일하다. 이를 두고 ‘꼰대스럽다’고 한다면 맹자는 이 또한 기꺼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보다는 자신이 인간답게 사는 것에 의미를 압도적으로 부여했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도덕적인 삶, 강한 삶

    맹자는 강자 앞이라고 하여 주눅 드는 법이 없었다. 일국의 군주는 언제라도 마음먹은 대로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한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신하라면 모름지기 군주에게 잘못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꼿꼿하게 직언해야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강자든 약자든 간에 상대방에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직설적으로 다했던 경험이 얼마나 되는지를 스스로 짚어 보기만 해도,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쉬이 알 수 있다.


    센 인간, 센 말투

    하루는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경’에 대해 물었다. 경은 조정에서 고위직에 오른 이들을 가리키는 일종의 존칭이었다. 이들은 언제라도 왕에게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맹자는 어떤 경을 말하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선왕은 경에도 종류가 있냐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답하였다. 하나는 왕의 친척이 아니면서 경인 부류가 그것인데, 친척인 경은 군주에게 큰 허물이 있어서 이에 대해 간했는데도 임금이 허물을 반복해서 범하면 군주를 갈아치운다고 했다.


    왕의 안색이 일순간에 돌변하였다. 군왕을 내쫓는다는 금기어 중의 금기어를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내뱉고 있으니 안색이 바뀌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러자 맹자는 괴이하다고 여기지 마시라며 자기에게 하문했기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며 선왕을 진정시켰다. 잠시 후 평정을 되찾은 선왕이 그러면 친척 아닌 경들은 어떠하냐고 물었다. 맹자는 친척이 아닌 경들은 임금이 큰 허물을 범했을 때 이에 대해 간했는데도 임금이 허물을 반복하면 관직을 그만두고 훌훌 떠난다고 답했다.


    이게 무슨 큰일이겠냐 싶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고위직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량이 출중하다는 뜻인데 그렇게 역량이 빼어난 이들이 하루아침에 조정을 떠난다면 국가에 끼치는 손실이 적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맹자의 시대는 명성이 매우 중요시되었던 시절이다. 역량 있는 이들이 하루아침에 관직을 그만두고 조정을 떠났다는 소문이 나면 그 나라의 국제적 위신이 바닥에 처박히는 건 시간문제이고 군주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된다. 여러모로 적잖은 타격이 야기되는 행보였다. 맹자는 이처럼 생사여탈권을 지닌 군주 앞임에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군주가 사뭇 불쾌해했을 얘기를 거침없이 당당하게 했다.


    혼자서도 당당하게

    또한 맹자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군주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센 발언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당당함으로 이어졌다. 자신을 돌이켜 꿀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화살 쏘기에 비유했다.


    어짊이란 화살 쏘는 것과 같다. 화살을 쏠 때는 자기를 바로잡은 후에 화살을 쏜다. 쏘아서 과녁 한가운데를 맞히지 못해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돌이켜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을 뿐이다.


    여기서 어짊은 도덕을 대변한다. 그리고 자신을 돌이켜 봄은 ‘자신을 바로잡음’,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음’이라는 행위를 발판으로 수행된다. 맹자는 어짊이 어질지 못함을 이김은 마치 물이 불을 이김과 같다고 보았다. 도덕이 결국에는 승리하리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은 자신을 돌이켜봄으로써 갖추어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당당하면 타인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된다. 도덕의 구비가 당당함의 원천이었음이다.



    흔들리지 않는 삶

    말, 글 파악하기

    말이 씨앗이 된다는 말처럼 말은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말에 담긴 내용의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말은 무언가를 믿게 하거나 하게 만든다는 얘기다. 그래서 말은 군주이든 평민이든 간에 항상 경계해야 한다. 근거 없는 말을 믿는다거나 그것으로 인해 움직이게 된다면 이는 말의 노예가 된 것이다. ‘나’가 말을 하고 듣는 것임에도 내가 말의 주인이 아니라 말의 노예가 된 셈이다.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을 온전히 알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아는 것이 나의 힘

    맹자는 “선생님의 장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는 것과 지언(知言), 그러니까 말을 안다는 점을 들었다.


    맹자는 말에는 두 층위가 있다고 보았다. 표층과 심층이 그것이다. 따라서 말의 뜻도 적어도 두 가지가 있게 된다. 하나는 글의 표층, 곧 문면의 뜻이고, 또 하나는 문면의 심층에 가라앉아 있는, 달리 말해 행간에 스며들어 있는 뜻이다. 지언은 바로 말의 심층에, 곧 행간에 담겨 있는 뜻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는 말하는 이의 마음을 파악하는 일이다. 따라서 말의 심층을 아는 일은 자연스럽게 말한 이의 마음을 아는 일과 등치되었다.


    맹자의 시대는 말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지언은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데 더없이 필요한 역량으로 꼽혔다. 또한 이때는 말만으로 경쟁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제자백가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이 시절에는 다양한 담론이 쏟아져 서로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말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였다. 한편 맹자의 시대는 명가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동양의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이들은 고도의 사변성을 갖춘 논리학 전문가들로 말의 쓰임새를 더 넓고 깊게 그리고 높게 갈고 닦았다.


    독법과 인간의 품격

    말을 잘 안다고 함은 글도 잘 읽어낸다는 뜻이다. 맹자는 말뿐 아니라 글에서도 발군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맹자』 여기저기에서는 『시경』의 시를 섬세하고도 깊이 있게 읽어 내는 맹자의 모습을 목도할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문학평론가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맹자는 사상 최초로 글을 읽어 내는 법, 그러니까 독법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했다. 글쓴이를 따져 보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논구해 본다는 뜻의 ‘지인논세(知人論世)’라는 독법과 읽는 이의 마음으로 지은이의 마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뜻의 ‘이의역지(以意逆志)’라는 독법이 그것이다.


    이의역지의 독법이 글의 참뜻을 파악하기 위한 독법이라면 지인논세의 독법은 글을 한층 풍요롭게 읽어 내기 위한 독법이다. 맹자는 물론 옛사람들은 글은 비유컨대 글쓴이의 아바타라고 생각했다. 글에는 그 글을 쓴 사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글이 곧 그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뜻이다.


    심지어 “시품출어인품(詩品出於人品)”, 그러니까 “시의 품격은 곧 사람의 품격에서 비롯된다”라고 하여 사람됨의 품격이 글의 품격으로 고스란히 나타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역으로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맹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옛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남긴 시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능히 알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의 근저에는 글쓴이의 시대를 연구하고 글쓴이에 대해 따져 보면 볼수록 그가 쓴 글을 한층 정확하고도 풍요롭게 읽어 낼 수 있게 된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서구 문학이론에서는 이를 역사전기비평이라고도 하는데, 글은 그 글이 태어난 시대와 글쓴이의 개인사적 배경과 연관 지어 그 뜻을 읽어 내야 한다는 관점이다. 맹자는 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서구보다 천수백여 년 앞서 선취했던 것이다.


    몸과 마음 닦기

    “조장(助長)”이라는 말이 있다. 춘추시대 송나라 사람 하나가 싹을 틔운 지 얼마 되지 않은 밭에 나가 싹이 더디 자란다면서 싹의 목을 쑥쑥 뽑았다. 얼른 쑥쑥 자라라는 의도에서였다. 그러고는 집에 들어와 대단한 일이나 한 듯이 가족들 앞에서 싹의 성장을 도왔다면서 피곤해했다. 아들이 얼른 밭에 나가 보았으나 이미 싹의 뿌리가 모두 들떠 물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채 시들시들 말라 있었다. 조급함 때문에 일을 몽땅 그르치게 되는 어리석음에 대한 우화이다.


    호연지기 기르기

    호연지기를 잘 기름이 자신의 양대 장점의 하나라고 맹자가 꼽자 제자들은 호연지기가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것은 의로움을 쌓아서 기르면 내 안에는 물론이고 천지간에 가득하게 되는 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절대로 조바심을 내지 말고 착실하게 길러야 한다고 당부하는 대목에서 꺼낸 이야기였다.


    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스승의 말씀대로 해도 과연 내 안에 호연지기가 축적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다. 의심이 들고 조바심이 나는 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했다. 이를 맹자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여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하며 기대하지 말며, 마음으로 잊어서는 안 되고 조장해서도 안 된다. 송나라 사람처럼 하면 안 된다.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의로움을 집적하는 일을 꾸준히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대하지 말라는 것은 이를테면 ‘오늘 하루 의로움을 쌓았으니 이제 호연지기가 이만큼은 쌓였겠지’ 하는 식으로 마음먹지 말라는 뜻이고, 마음으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설령 눈으로 확인이 안 되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바가 없다고 하여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송나라 사람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마음만 앞서서 조장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다. 인용문의 핵심은 호연지기를 기름의 요체는 일삼음, 곧 의로움을 집적하는 일을 꾸준히 해 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충실하게 차 있는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호연지기는 야기(夜氣), 그러니까 밤에 길러져서 새벽에 일어나면 느낄 수 있는 맑은 기운처럼 천지간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를 내 안에 집적하려는 노력만 꾸준히 한다면 반드시 내 안에 차오르게 된다고 보았음이다.


    맹자는 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여겼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고 여겼다는 얘기다. 만약 호연지기가 부족하게 된다면 금수와 별 차이가 없게 된다며 양기(養氣), 그러니까 호연지기를 기름을 중시했다.


    자반, 돌이켜 성찰하기

    호연지기를 기르는 일 외에 맹자가 도덕으로 몸과 마음을 닦는 방도로 자주 제시한 것은 “자반(自反)”, 그러니까 돌이켜 자신을 반성, 성찰하는 길이었다. ‘자반의 윤리학’, 곧 스스로 돌이켜 봄의 윤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큼 맹자는 이를 강조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가 나를 난폭하게 대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볼 것이다. 내가 반드시 어질지 못했을 것이리라, 내가 반드시 무례했을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런 일이 얼어나겠는가?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어질고,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예의를 지켰음에도 그의 난폭함이 또다시 그와 같다면 군자는 반드시 또다시 스스로를 돌이켜 볼 것이다. 내가 반드시 정성을 다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정성을 다했음에도 그의 난폭함이 여전히 그와 같다면 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단지 망령된 자일 따름이다. 이와 같으니 금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수와 같은데 또 무슨 비난을 할 수 있으리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포악하게 굴면 그에게 화를 내기 전에 내게 잘못이 있지 않을까 하여 내 자신을 먼저 성찰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잘못이 없음에도 그자가 또다시 나를 포악하게 대하면 재차 나를 반성해 본다고 한다. 내가 잘못을 했음에도 혹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재삼재사 스스로를 돌이켜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내게 분명히 아무런 잘못 없음이 재삼재사 확인되었음에도 그자가 여전히 나를 포악하게 대한다면 그때는 그자를 짐승만도 못한 자라고 단정하고 상대를 안 한다는 얘기다. 이는 그저 소극적이거나 방어적 태도에 불과하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당한 처사에 강력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기 위해 근거를 확보하고 힘을 비축하는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태도다. 진정한 강자만이 돌이켜 자신에게서 먼저 원인을 찾을 줄 알기에 그러하다.


    자신을 돌이켜 봄은 그 자체로 자신을 바로잡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득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자기를 성찰한다는 것은 자신의 결핍을 찾아내어 스스로를 주저앉히는 길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설령 결핍을 발견한다고 해도 이를 자기 강화의 계기로 감싸 안으면서 스스로를 더 강하고 충일하게 만들어 가는 길이다.


    사람이 고귀한 존재인 이유

    맹자는 사람이 고귀한 존재라고 여겼다. 다만 자기 안에 고귀한 것을 갖고 있어도 그런 줄을 모르는, 자신이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도덕의 힘을 생활하는 데 필요한 또는 유용한 실질적 힘으로 인정한 적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는 ‘착하다’는 형용사가 사람에게 더는 적용되지 않는 세태를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착한 음식’, ‘착한 물가’처럼 사물이나 가격에는 좋은 의미로 붙여 사용하는 반면에 사람에게, 특히 성인에게는 웬만해서는 잘 쓰지 않는다. 그만큼 도덕적 가치와 실생활은 저만큼 분리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은 누구나 도덕이 내재된 고귀한 존재라고, 이것의 자각이 필요하다며 목청을 돋운다고 해도 별무소용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실험을 해 보자. 저마다 나는 도덕을 본성으로 타고난 고귀한 존재다. 그렇기에 태어난 바 그 자체로 이미 내적 결핍이 없이 충일한 상태라는 점을 자각하고 이를 근거로 일상을 영위해 간다면 과연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물론 현실화되기 무척 어려운 사고실험에 불과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악한 이, 착하지 않은 이가 없었던 적이 없으므로 이러한 사고실험이 공허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사고실험을 계속해 본다면, 모두가 다 이러한 자각 위에서 일상을 영위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 사회의 다수가 이러한 자각 위에서 일상생활을 꾸려 가고 있다면, 그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될까? 이것저것 다 떠나서 남들은 어떻게 살든 나만이라도 내가 도덕으로 인하여 고귀하며, 그 자체로 내적 결핍이라고는 전혀 없는 온전히 충일한 상태라는 자각 위에서 삶을 살아간다면?


    시대가 달라도 문명 조건이 판이해도 몸과 마음을 닦을 줄 알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외적 조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내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맹자처럼 자신이 주도하는 삶을 당당하고도 일관되게 펼쳐낼 수 있게 되기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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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