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조용헌의 내공

저   자
조용헌
출판사
생각정원
출판일
2024년 02월







  • ‘내공’이란 동양의 정서로서,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해 내면에 다져지는 힘과 기운을 뜻합니다. 인내력, 집중력, 평점심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욕망과 충동, 무의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평정심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189가지의 압축된 이야기를 통해 전해드립니다.



    조용헌의 내공


    관점이 내공이다 : 한 생각이 운명을 바꾼다

    너의 꾀꼬리를 찾아라

    경봉 선사(1892~1982)는 도를 통한 도인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사가 계신 통도사 극락암을 찾아왔다.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 장수도 찾아오고,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도 오고, 선방 수좌들도 왔다. 빈부귀천이 모두 와서 ‘저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인생의 길을 물었다. 통도사는 불지종가라고 불리는 사찰이다. 그만큼 역사가 깊고 스케일이 큰 사찰이다. 뒷산의 바위 봉우리 모습이 독수리 형상이다. 독수리 ‘취’자를 써서 산 이름도 영취산이다. 경봉은 180cm가 훌쩍 넘는 키였으므로 그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다. 영취산의 영안을 지닌 독수리가 극락암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맹금류 독수리는 자상한 독수리였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한마디씩은 해주었다. 1970년대 중반 연예인 대마초 사건이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막 히트시켰던 조용필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가수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백수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행보가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술에 절어 인생을 비관하며 보내지만, 조용필은 통도사 극락암에 계신다는 도인을 만나 보기로 하였다. 조용필이 극락암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데 마침 경봉 스님이 스님이 거처하던 방인 삼소굴에서 마당에 나왔다가 조용필을 봤다. 이때 경봉 선사의 나이 80대 중반이었다.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인가?” “노래 부르는 가수입니다.”

    “그래, 꾀꼬리가 여기에 왔구나! 너는 꾀꼬리다. 꾀꼬리를 찾아서 와 봐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조용필은 꾀꼬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부지런히 찾았다. 도인이 하신 말씀이니까 그냥 재미로 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뭔가 있는 말씀이다. 밥 먹을 때도 찾아보고, 똥 누면서도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꾀꼬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몇 달간 이 화두를 풀기 위해서 머리 싸매고 고민하던 조용필은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 제목이 ‘못 찾겠다 꾀꼬리’였다.


    뛰어난 예술가는 자기가 직접 겪었거나 당면한 문제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조용필의 ‘못 찾겠다 꾀꼬리’는 당대의 선지식이 던져준 화두를 고민하다가 나온 곡이다. 한번은 화가 장욱진이 극락암에 왔었다. 댓돌에 벗어 놓은 장욱진의 신발을 보고 경봉은 ‘까치가 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장욱진은 나무와 까치의 화가다. 평생 그린 유화 730점 중 60%에 까치가 등장한다. 선사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있었다.


    ‘미친놈’의 미학

    조민환의 ‘동양의 광기와 예술’(성균관 대학교출판부)을 읽으면서 지나온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광자’의 미학을 다뤘다. 동양 전통에서는 공자 이래로 ‘미친놈’을 존중하는 전통도 일부 있었다고 본다. 공자가 정치한다고 주유천하 할 때 ‘접여’라는 광인을 만나서 한 소리 들었다. 의역하면 “당신,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이러고 다니는데 말짱 헛일이다.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나. 이거 다 시간 낭비다. 왜 이리 험난한 인생을 살고 있나? 인생 짧다.” 공자가 타고 있던 수레에서 내려 이 인물과 이야기를 나눠 보려 하였으나 접여는 총총히 사라져 버려서 대화하지 못했다.


    공자의 수레에 붙어서 돌직구를 날렸던 접여는 초나라의 광인이었다. 원래 이름은 육통인데 당시 사람들이 접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유명인사나 고관대작이 수레를 타고 지나가면 그 수레 옆에 붙어서 시비를 걸거나 집적거리는 행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 접여를 인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 행보에 대해서 충고를 더 들어 보려 하였지만 접여는 그 정도에서 피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더 이상 이야기해 준다고 해서 공자가 정치를 그만둘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메시지는 짧아야 좋다. 공자에게 한마디는 해준 접여야말로 광인의 미학, 광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광기가 예술 장르, 즉 그림과 글씨에 접속되면 작품이 많이 나왔다. 오로지 부동산과 주식에 붙잡혀 있는 범부들에게 그 어떤 통쾌감을 주는 작품 말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조선조의 화가 임희지(1765~?)의 인생에서 보여준 광기가 특히 통쾌하였다.


    “배를 타고 교동도에 가다가 폭풍을 만나서 배가 거의 뒤집어질 상황이었다. 노련한 뱃사람들도 혼이 빠져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정신없이 부르는데, 오직 임희지만 갑자기 껄껄대고 웃으며 깜깜한 구름 속 허연 물결 사이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파도가 잠잠해진 뒤에 사람들이 춤을 춘 이유를 물으니 ‘누구든지 한 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다 가운데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장관은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저자는 스티브 잡스의 1997년 광고 문구 ‘자기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다’도 광자 미학의 전형으로 보고 있다.



    사람에게 기대다 : 다른 인생이 나에게 복을 불러온다

    오타니의 만다라트

    만다라(mandala)와 아트(art)의 합성어가 ‘만다라트’라고 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방위적인 계획표를 가리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도상이 티베트의 만다라이다. 만다라를 심플하게 압축하면 주역의 구궁도로 전환된다. 정사각형 안에 9개의 네모 칸이 있는 게 구궁도이다. 중앙 한복판의 칸은 비워 놓고 나머지 8개 네모 칸에 팔괘를 배치해 놓았다. 만다라트는 이 구궁도의 배치를 활용하여 자신의 목표 달성 계획과 방법을 각자의 네모 칸에 집어넣는 방식이다.


    10년 연봉 7억 달러의 미 프로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 그가 고교 시절에 작성했다는 만다라트가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다. 구궁으로는 밑의 줄 가운데 칸에 운을 표시해 놓은 부분이다.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운을 좋게 하기 위하여 8가지 실천을 해야 한다고 적어 놓았다. 인생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운’이라고 하는 부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40세는 되어야 하는데 겨우 16~17세의 고교생이 어떻게 이를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오타니는 운을 받으려면 먼저 ‘쓰레기 줍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여겼다. 쓰레기를 줍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흘린 행운을 줍는다’고 생각하였다는 점이 놀랍다. 쓰레기를 잘 줍는 매너는 일본 문화에 박혀 있는 것 같다. 축구 경기 끝났을 때 일본 관중들이 관중석 쓰레기를 주워서 가는 장면을 자주 본다. ‘인사하기’도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가 먼저 상냥하게 인사하는 것이 운을 좋게 한다고 여겼다. ‘심판을 대하는 태도’라는 항목도 적어 놓았다. 자기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 상황에서 심판에게 심한 불만을 표출하는 언행을 하지 말자는 다짐일 것이다. 자기가 던진 공이 분명히 스트라이크인데 심판이 자꾸 볼이라고 하면 열 받는다. 이때 불만을 적당히만 표출하고 심하게는 표출하지 말자는 다짐으로 읽힌다. ‘물건을 소중히 쓰자’도 있다. 글러브나 야구 배트를 함부로 던지지 말자일 것이다. ‘응원받는 사람’도 있다. 나는 대중과 팬들로부터 응원받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겸손이다. 자기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자각은 사람을 여유롭고 관대하게 만들어준다. 관대할 때 사람의 인품이 형성된다. ‘책 읽기’도 포함되어 있다.


    필자도 예전에 ‘팔자 바꾸는 방법 6가지’에서 독서를 꼽은 적이 있다. 오타니의 만다라트에서 배울 게 많다.


    인생이 묻어 있어야 진짜 ‘구라’

    ‘구라’라고 하는 단어는 점잖지 못한 비속어지만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쓸 때도 있다. 때로는 고상한 맥락에서 통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유홍준 선생에게 들었다. 이건 필자에게 지적 자극이 되었다.


    재작년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대만까지 갔다 오는 그린보트를 1주일 동안 유 선생과 같이 탄 적이 있다. 배를 타고 망망대해에 떠 있는 상황에서는 육지로 나갈 수도 없고, 전화도 오지 않기 때문에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다. 배의 갑판에 설치한 의자에 앉아 동중국해를 바라보면서 한국 구라의 계보와 전통에 관한 대담을 하게 되었다.


    “구라를 그리 차원 높게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히스토리보다 높은 단계로 보죠. 역사는 한번 읽는다고 해서 완전히 머리에 들어오지 않잖아요. 노력을 해서 외워야 하는 부담이 있죠. 그런데 구라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들으면 머릿속에 쏙 남아요. 자연스럽게 기억이 되죠. 그래서 역사보다 한 차원 더 높은 경지가 구라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라는 것이죠.”


    역사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 구라다! 역사는 습기를 제거해 버린 건어물이라고 한다면, 구라는 등이 푸른 싱싱한 제주도 방어에 비유할 수 있다. 건어물은 씹으려면 딱딱하고 방어 회는 씹는 부담이 작고 입에서 녹는다. 구라의 특징은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야기에 내가 참여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이야기가 나의 삶에 들어와서 에너지로 전환될 수도 있고, 나의 경험이 그 이야기에 보태져서 또 다른 이야기로 분화될 수도 있다. 물론 역사도 그럴 수는 있지만 그 형식에서 구라가 훨씬 흡수율이 높다.


    구라의 단계로 전환되려면 자기의 인생 체험과 체취가 녹아 있어야 한다. 인생 체취가 결여되어 있으면 전달력이 약하다. 책만 많이 읽는다고 해서 구라꾼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책상물림이 된다. 거기에 인생이 묻어 있어야 윤기가 돈다. 양봉하는 벌이 먹은 설탕물이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꿀이 된다. 벌의 배 속을 통과하지 않은 상태는 그냥 설탕물이다.


    “그렇다면 한국 구라계의 원조는 누구를 꼽겠습니까?”


    “벽초 홍명희라고 봐요. ‘임꺽정’이 구라계의 대작이죠. 여기에는 조선의 정조가 들어가 있습니다.” 지방 촌놈이 아닌 서울 사람이 구라꾼 되기가 어려운 법인데, 유 선생은 일찍부터 시골 유적지 답사를 많이 하면서 한 꺼풀을 벗은 구라꾼이 되었다.



    축적된 시간에 귀 기울이다 : 오래된 것들에는 견뎌온 힘이 있다

    명문가에는 스토리가 있다

    양반에도 급수가 있다. 호남의 A급 양반 집안이 전남 창평에 살고 있는 창평 고씨들이다. 이 집안을 양반으로 꼽는 이유는 임진왜란 때 삼부자가 의병을 이끌고 나가 모두 순절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봉 고경명과 차남 고인후가 금산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당시 60세의 고경명이 의병을 이끌고 나갈 때 쓴 ‘마상격문’이 유명하다. 말도 탈 줄 모르는 늙은 선비가 나섰으니 함께 싸우자는 독려가 담겨 있다. 장남 고종후는 아버지와 동생의 원수를 갚겠다며 진주성 2차 전투에 의병을 이끌고 나갔다가 전사한다.


    이 집안은 300년 후인 구한말에도 후손 녹천 고광순이 집안과 나라의 원수와 싸우겠다며 의병을 이끌고 연곡사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고광순은 ‘불원복’, 즉 잃었으나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다라고 쓴 군기 앞에서 아침저녁 다짐했다. 불원복은 주역 24번째 지뢰복 괘로 회복을 뜻한다. 광복에 대한 염원이다.


    규장각 직각 벼슬을 지냈던 고정주는 사립학교인 창흥의숙을 세워 인재를 키웠다. 인촌 김성수, 현준호, 가인 김병로가 배출됐다. 한편 고경명의 후손 중 일부가 전남 창평을 떠나 장흥의 평화마을에 내려가서 살았다. 장흥은 제암산, 억불산, 사자산, 천관산 등 명산이 많아서 근래에 소설가가 많이 나온 고장이다. ‘장흥 가서 소설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이다.


    억불산 자락의 평화마을에는 고경명의 후손인 고씨들이 살았다. 평화마을에는 무계고택이 유명하다. 수백 년 된 팽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고택 앞 송백정은 소나무와 백일홍이 어우러져 있는 운치 있는 연못인데, 고택 뒤로 솟아 있는 억불산 암봉의 강한 바위 기운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인공으로 조성한 비보 연못이기도 하다. 무계고택에서 배출된 인물은 고제환(1810~1890)이다. 고제환은 40세 때 보성군수를 지내다가 파직당했다. 나라의 세금을 착복한 지방 토호 세력을 잡아다가 곤장을 때렸기 때문이다. 곤장 맞은 토호 세력은 당시 권력 실세인 안동 김씨들과 결탁되어 있었고, 안동 김씨의 압력으로 군수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고향인 평화의 무계고택에서 쉬고 있던 고제환은 53세 때 ‘난’의 주동자가 된다. 장흥의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 착취를 했고, 착취당한 시골 사람들이 전직 군수였던 고제환에게 찾아와 하소연하자 고제환은 ‘아전들을 혼내주라’고 지시한 것이다. 군수를 지냈던 사람이 ‘고제환의 난’ 주동자가 된 것이다. 군수가 난의 주동자가 된 일은 매우 드물다. 고초는 겪었지만 죽지는 않았고, 철종이 죽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복권되었다. 명문가로서 스토리가 많은 집안이다.


    명제 선생과 토한 논

    유럽의 유서 깊은 성당을 구경하면서, 그 성당 지하에 도력이 높았던 옛날 신부님들의 유골을 모셔 놓은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풍수 사상의 핵심이 백골감응설이다. 이를 보면서 그 도인 신부님들의 혼령이 그 성당과 신자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수백 년 된 고택과 종택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그 집안의 선대 큰선비 혼령들이 후손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다. 풍수 사상과 조상 숭배가 결합한 나의 조잡한(?) 신념 체계 때문이다.


    충남 논산의 노성리 명재 윤증(1629~1714) 고택을 갈 때마다 명재 선생의 생전 처신과 가르침을 생각한다. 먼저 명재는 ‘벼슬 환장병’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조선조는 과거 합격해서 벼슬하는 것이 최고 가치였다. 벼슬하려고 환장한 사회였다. 명재는 죽을 때까지 벼슬을 거절하였다. 임금이 여러 가지 벼슬을 준다고 불렀지만 끝까지 가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우의정 자리도 사양하였다. 일생 벼슬을 사양하는 상소문을 40차례 이상 임금에게 올렸다. 일생을 처사로 일관하였다.


    둘째는 지역 차별을 해소하려고 노력한 점이다. 벼슬을 사양하던 그가 딱 한 차례 벼슬을 해 볼까 하고 서울 턱밑의 과천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 1683년 54세 때 일이다. 과천에서 친구이자 당시 신망이 높았던 박세채와 밤새 토론하였다. 토론 주제는 ‘내가 입각하면 노론 정권에서 차별받고 있는 영남 남인들을 등용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는 영남이 심하게 천대받던 시절이었다. 정권 실세인 박세채로부터 ‘장담 못 한다’는 답변을 듣고 바로 보따리 싸서 논산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호남 출신인 필자는 예전에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하곤 하였다.


    셋째는 ‘토한 논’이다. 당시 도지사, 시장, 군수가 부임할 때마다 명재 선생에게 인사를 갔다. 선생과 겸상해서 식사를 마치고 떠날 때는 300m 거리에 있는 논에다가 먹은 것을 토하곤 하였다. 조로 만든 죽이나 꽁보리밥에 깻잎, 볶은 고추장, 김치가 주메뉴였다. 벼슬아치들이 평소 고량진미를 먹다가 갑자기 험악한 음식을 먹으니까 배 속에서 감당을 못 했던 것이다. VIP 방문객들이 음식 토한 지점을 ‘토한 논’이라고 불렀다. 명재의 청렴함을 기억하기 위해 명재의 후손들은 혼인 초례상에 조밥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넷째는 ‘우리 집안 윤 씨들은 양잠을 하지 말라’는 선생의 엄명이었다. 서민 먹을거리인 양잠을 양반 집안에서 해버리면 서민들 밥 굶는다는 게 이유였다. 선생의 혼령은 아직 살아 있다.



    이야기로 마음을 부드럽게 갈아 두다 : 상상력으로 우리는 더 멀리, 더 높게, 더 깊이 산다

    배의 선수와 선미에서

    명산의 산신령 손바닥에서 놀던 토끼가 배를 타고 넓은 바다에 나간다는 것은 용궁 체험에 해당한다. ‘나의 에고(ego)가 넓은 대양으로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대양이 나의 에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인가?’


    환경재단에서 주관하는 그린보트를 타고 일주일 동안 부산에서 제주도를 거쳐 대만을 왕복하는 크루즈 항해를 해 보았다. 산속에 있던 토끼가 바다로 나간 셈이다. 크루즈 배는 14층까지 있는 5만t급이다. 큰 배의 맨 앞쪽인 선수와 배의 뒤쪽인 선미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던 일이 일주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배가 앞을 향해 가는 선수에서 바라다보는 바다는 ‘새 바다’였다. 선미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헌 바다’였다. 선수에서는 바늘로 꿰맨 자국이 없는 순결한 바다를 뱃머리가 가르면서 항해하는 모습으로 비친다. 선미에서는 대형 스크루가 힘차게 돌아가면서 바닷물을 세탁기처럼 돌려 버린다. 거의 3m 크기에 가까운 대형 금속제 스크루 2대가 회전하면서 만들어내는 하얀색 포말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선미의 포말이 200m쯤 포말 자국을 유지하면서 뒤로 밀려 흘러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다시 대양과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 흔적이 소멸하고야 마는 모습을 말이다. 선수의 바다는 희망에 부풀고 진취적인 바다이지만 배의 뒤쪽에서 포말의 자국을 바라다보는 바다는 지난 삶을 회고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배의 스크루는 인간의 욕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색명리를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인간 욕망의 힘은 저 스크루처럼 쉬지 않고 돌아간다. 그리고 바닷물의 색깔도 변화시킨다. 검은 흑조처럼 보이는 바닷물이 일단 스크루에 감겼다 나오면 하얀색의 포말과 함께 비취색 같기도 한 ‘깊고 푸른색’의 바닷물로 색깔이 변한다. 이 깊고 푸른 바닷물은 황홀한 색깔이기도 하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흡인력이 있다.


    ‘스크루’라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이 아름다운 물거품. 왜 이 물거품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까. 인간의 끈적끈적한 욕망이 더러운 게 아니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이치를 배 뒤쪽의 선미에서 알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 욕망의 흔적들도 다시 대양과 합류되면서 언제 그런 자취가 있었냐는 듯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게 인생의 이치란 말인가. 그 이치를 싫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


    선미에서 관조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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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