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청 도서요약
   국내도서 요약 

영원한 현재의 철학

저   자
조대호 (지은이)
출판사
EBS BOOKS
출판일
2023년 12월







  • 고대 그리스 철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상기하고 숙고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요? 시대의 경계를 넘어선 고대 그리스 철학의 가치를 되짚어 봅니다.



    영원한 현재의 철학


    소크라테스, 인간의 삶에 대해 묻다 _ 사람다운 삶을 찾는 일상의 대화

    철학과 ‘참된 정치’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하는 질문으로 시작해볼까요? 철학자들은 질문의 전문가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토론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철학자는 묻고 따지는 일을 아폴론 신에게 받은 소명으로 여겼던 소크라테스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잘하고 좋아하는 철학자에게도 아주 부담스러운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철학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철학’의 이름으로 내놓고 보여줄 만한 성과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죠.


    기술자는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서, 소설가는 소설을 써서 자신의 정체와 성과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철학자는 그런 성과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철학자들도 논문을 쓰고 책을 내긴 하지만 그런 작업이 철학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아무 글도 쓰지 않고 철학을 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이번 장의 목적은 바로 이 질문, 즉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대답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남긴 두 개의 발언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물론 둘 다 플라톤이 기록한 말입니다. 하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나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고르기아스』라는 유명한 연설가의 이름을 딴 대화 편에 있는 말입니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더 젊은 사람이건 더 나이 든 사람이건 누구든 붙잡고 영혼이 될 수 있는 한 탁월하게 되도록 열심히 마음을 써야지 그에 앞서서나 또는 그만큼 열심히 신체나 재물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변론』, 30a)


    『고르기아스』의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나 혼자 그렇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말하지만-소수의 아테나이인과 함께 참된 정치술을 시도하며 실제로 정치를 행하는 것은 요즘 사람들 가운데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하네.”(『고르기아스』, 521d)


    종합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영혼의 ‘탁월함’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는 것이 ‘참된 정치’라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무슨 뜻일까요?


    ‘영혼의 탁월함’은 ‘정신의 탁월함’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탁월함’은 그리스어 ‘아레테’를 옮긴 말인데, 앞으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다룰 때도 자주 만나게 될 개념입니다. ‘아레테’를 사람들은 보통 ‘virtue’, 즉 ‘덕’이라고 번역합니다. ‘덕’, ‘미덕’,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유로운 옷을 벗고 제복을 입으라고 강요받는 것처럼 불편함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리스어 ‘아레테’의 본뜻은 그렇게 딱딱한 것이 아닙니다.


    ‘아레테’는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눈의 기능은 보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을 통해 잘 볼 수 있는 상태가 눈의 아레테입니다. 눈이 가지고 있는 높은 시력이 눈의 아레테이겠죠. 또 말의 기능이 달리는 데 있다고 해봅시다. 그렇다면 말을 잘 달릴 수 있게 해주는 상태가 말의 아레테입니다. 잘 조련된 말이 그런 아레테를 갖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고유한 기능이 있다면 이 기능을 잘 실현하게 하는 아레테도 있을 겁니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 잘 사는 상태가 사람의 아레테입니다. 사람의 아레테는 곧 영혼의 아레테, 정신의 아레테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기능은 정신적인 활동에 있으니까요.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그런 아레테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 즉 “영혼이 될 수 있는 한 탁월하게 되도록 마음을 쓰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사람들에게 아레테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철학이 ‘참된 정치술’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대략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아레테에 마음을 써야 한다. 정치는 사람을 잘 살게 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아레테에 마음을 쓰게 하는 것이 참된 정치이다. 하지만 아레테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과 ‘참된 정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생각해 볼 것이 더 있습니다. 영혼의 탁월함을 놓고 소크라테스가 사람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살펴보아야 하죠. 또 그런 대화가 어떤 뜻에서 정치적인 의미를 가지는지 좀 더 따져봐야 합니다.


    혼란의 시대에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치적 분열과 도덕적 혼란의 시대에 철학자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폭풍우 치는 바다의 사나운 파도처럼 몰려오는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소크라테스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정의를 지키려면 목숨을 잃고 목숨을 지키려면 정의를 잃는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극단의 상황 속에서 가능한 한 최선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진정 정의를 위해서 싸우려는 사람은 그가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반드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야지 공적인 사람으로서 처신해서는 안 된다.”(『변론』, 32a)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 살면서 영혼의 탁월함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영혼의 탁월함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용기란 무엇인가?’, ‘절제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이런 질문을 놓고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일을 간단히 요약하면 정의가 없는 시대에 정의를 묻고 절제가 없는 시대에 절제를 묻고 참된 용기가 없는 시대에 용기에 대해서 물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사람들은 대답하기 귀찮았겠지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가 엄청나게 미웠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심각한 내분과 혼란의 시기에 도덕에 대한 대화나 나누고 있다니 너무 한가한 것 아니야?’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반문할 듯합니다. ‘도덕의 근본이 서지 않는 한 사람들이 얻어낸 모든 것은 파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 정의, 우정, 용기, 절제가 없는 세상에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편리함을 찾는 기술이 우리를 잘 살게 할 수 있을까?’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이나 높은 명성도 영혼에 도덕적 탁월함이 없으면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되지 못한다.”(『변론』, 30b)


    재물도, 명성도, 권력도 탁월함을 갖춘 사람들에게만 좋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탁월함을 갖춘 사람들, 정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적은 재물이나 권력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만, 불의를 일삼고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재물이나 권력도 결국은 공동체와 자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데 쓰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캐묻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와 질문과 대답을 나눈 사람 중 많은 사람이 그를 욕합니다. ‘자꾸 질문만 하지 말고 대답을 해주세요. 직접 질문에 대해 대답해 보세요.’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시미치를 뚝 떼고 대꾸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사람들이 더 따져 물으면 소크라테스에게는 준비된 대답이 있습니다. ‘영혼의 탁월성에 대한 대화 자체에 의미가 있다. 사람답게 살려면 캐물어라. 캐묻는 것이 사람다운 삶의 방식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압축한 문구가 “캐묻지 않는 사람은 살 가치가 없다.”(『변론』, 38a)라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대해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캐묻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따져보면 왜 캐묻는 삶이 필요한지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캐묻지 않는 삶이란 스스로 삶의 태도나 방향에 대해서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는 삶, 남들이 사는 대로 사는 삶이 되겠죠. 그것은 습관을 따르는 삶일 수도 있고, 외부의 강제력에 내맡겨진 삶일 수도 있고, 유행을 따르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사람다운 삶은 없습니다. 습관에 따르는 삶은 동물에게도 가능합니다. 외부의 강제에 내맡겨진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유행을 따르는 삶은 타인의 욕망을 좇는 군중 속의 익명적인 존재의 삶이지요. 물론 누구도 습관이나 외부의 강제나 군중의 취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거기 머물기만 한다면 나 자신의 삶은 어디 있을까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 습관을 따라야 할까? 내가 왜 이 강제를 받아들여야 하지? 대중의 욕망이 아닌 나 자신의 욕망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이 캐물음의 삶으로 자신을 인도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잘나가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잘나가는 시대의 특징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속도는 제어를 싫어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속도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은 반성과 성찰에 무관심한 채 허둥대면서 앞으로 달려갑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런 시대의 현실 정치는 “절제와 정의는 빼놓고 항구와 조선소, 성벽, 공물 그리고 그런 종류의 하찮은 것들로 나라를 꽉 채우기”(『고르기아스』, 519a)에 몰두합니다. 잘나가는 나라의 대중들은 그런 것들을 원하고, 정치는 대중의 욕망에 맞춰야 합니다. 누구도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니까요. 어떤 정치가도 사람들을 견책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표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잘나가는 나라’에는 반전이 따릅니다. 잘나가는 나라가 ‘막 나가는 나라’로 뒤집히는 거죠. 부와 명성을 자랑하던 아테나이도 그렇게 내정과 혼란의 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런 반전의 시대를 경험한 사람이었죠.


    그의 철학은 이런 시대에 질문을 통해 반성과 성찰을 촉구했습니다. 보이는 성과가 없으니까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겠죠.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는 그것이 ‘참된 정치’였습니다. 20세기 철학자 칼 포퍼는 ‘소크라테스의 비판은 민주적인 비판이고, 민주주의적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비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플라톤, 보이는 것 넘어 보이지 않는 진리를 찾다 _ 병든 세상을 구원할 정의와 철학

    민주정과 철인통치론

    이번 장에서는 플라톤 철학의 최대 관심사에 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어떻게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바로 이 문제가 플라톤 철학의 최대의 관심사였죠.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정치적 격변을 겪은 20대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뒤 50대에 들어서나 플라톤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나라는 정의로운 나라이고 정의로운 나라는 철학자가 통치하는 나라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이 신념을 표현한 국가의 한 구절이 있어 읽어보겠습니다.


    “만약 철학자들이 여러 나라에서 왕이 되거나 또는 우리가 오늘날 왕이나 통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든가 해서 이것들, 즉 정치적 권력과 철학이 한군데서 만나지 않는다면, 여보게, 글라우콘 내가 생각하기엔 여러 국가나 인류에게나 재앙이 그치지 않을 걸세.” (『국가』, V 473c)


    플라톤의 철인통치론은 어느 시대나 그의 철학을 둘러싼 논의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습니다. 철인통치론은 시민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려는 반민주적인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왜 플라톤같이 위대한 철학자가 민주정과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고 한 사람의 정치, 즉 철인왕의 정치를 옹호하고 나섰을까요? 이것이 이번 장의 질문입니다. 먼저 민주정에 대한 플라톤의 반감이 어디서 왔는지 따져보아야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무정부적 ‘자유’와 불평등한 ‘평등’

    플라톤이 경험한 민주정은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 민주정과 전혀 달랐습니다.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고 27년 동안 계속되면서 아테나이의 민주정은 급속히 타락했습니다.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바로 민주정이 내건 ‘자유’와 ‘평등’ 때문이었습니다. 민주정의 기본 이념은 평등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이소노미아(isonomia)’. 즉 동등한 권리, 법 앞에서의 평등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평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 앞에서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뜻에서의 ‘법 앞에 평등’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이룬 공적에 따라서 다른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의 ‘비례적인 평등’입니다.


    파이를 나눌 때 10개의 조각을 10명이 똑같이 나누는 것이 ‘법 앞의 평등’이나 ‘산술적 평등’이라면, 두 몫의 일을 한 사람, 세 몫의 일을 한 사람에게는 각각 두 배, 세 배의 파이 조각을 더 주는 것은 ‘비례적 평등’입니다.


    플라톤의 눈에는 당대의 아테나이는 이 두 가지 개념의 균형이 무너져 내린 사회였습니다. 플라톤은 이렇게 개탄했죠. ‘똑같은 것을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이 나눠주는 것이 평등인가?’ 그가 보기에 그런 평등은 불평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산술적 평등과 비례적 평등 사이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평등이 무차별적인 평등, 불공정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정의 또 다른 이념인 자유도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자유는 본래 ‘아우토노미아(autonornia)’, 즉 자율을 뜻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타인의 강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말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상태가 자유입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외세의 강압을 배제하고 자 국의 관습과 전통적인 법에 따라 행동하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플라톤 시대에 이르러 자율로서의 자유는 무질서와 동의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자유에 취한 사람들은 외세나 권력의 부당한 지배뿐만 아니라 관습과 법의 정당한 지배까지도 구속으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죠. 자유가 자율에서 모든 지배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르키아(anarchia)’, 즉 무정부 상태로 변질한 것입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렇게 만족을 모르는 욕망이 지배하는 자유의 사회, 불공정으로 전락한 평등의 사회, 그리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겠죠. 나라는 마치 격랑과 폭풍우 속에서 항로를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의 올바른 항해가 가능할까요? 어떻게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플라톤의 최대 고민이자 관심사였습니다.


    철학자가 통치해야 하는 이유

    플라톤만큼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올바른 정치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플라톤보다 200년 전에 살았던 정치가 솔론(Solon, 기원전 630~560)이었습니다. 솔론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사에서 매우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위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이죠. 혼란한 정치 속에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신탁이 내렸습니다.


    “배에 올라타서 키를 잡아라. 아테나이의 많은 시민이 그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솔론은 이 신탁의 말을 듣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민주정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플라톤이 고민한 것도 솔론의 문제와 똑같았습니다. 누구를 키잡이로 앉힐까? 어떻게 올바른 키잡이가 배를 이끌게 할 수 있을까? 플라톤에게는 영혼 삼분설과 이데아론이 이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영혼 삼분설은 인간의 영혼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세 부분의 힘이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욕구가 강하고, 어떤 사람은 기개가 드높고, 어떤 사람은 이성 능력이 강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똑같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어도 세 부분의 힘이 어디가 강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의 개인차가 발생하죠. 그래서 플라톤은 개인마다 이런 차이가 있는 만큼 그들이 담당하는 사회적 역할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욕구가 강한 사람은 생산을 하고, 이성 능력이 강한 사람은 통치를 하고, 기개가 강한 사람은 통치자를 도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욕구가 강한 사람이 정치를 하게 된다면 자신의 사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적인 질서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겠지요. 또 명예욕이 강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키거나 자신의 승부욕을 채우기 위해서 공적인 질서를 훼손할 가능성이 있겠죠.


    플라톤은 이런 이유로 각자 저마다 가진 능력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역할 분배는 양육과 교육 과정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개인 성향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 차이에 따라서 각자의 능력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상태, 즉 아레테 혹은 탁월성의 상태로 인도하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나라의 전체 시민들이 저마다 자신의 일을 잘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업과 조화의 상태가 바로 플라톤이 생각한 한 나라의 올바르고 정의로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교육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통치자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해서 지혜를 갖게 하는 일이죠. 지혜를 갖는다는 것은 플라톤에게는 이데아에 대해서 아는 것을 뜻하고, 통치자가 이데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배의 키잡이가 별과 항로에 대한 앎을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데아를 아는 사람은 바로 철학자이고 이러한 철학자가 곧 통치자여야 한다는 것이 플라톤 철인통치론의 핵심입니다. 플라톤은 이렇듯 사회적 분업의 원리와 철학자 교육을 강조했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가 강조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철인 통치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돕는 보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적인 관계나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온전히 공적인 일에 몰두하도록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공적인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사적인 가족도, 사유 재산도 없이 엄격하게 공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 어려운 요구를 할까요? 사익 추구나 사적 관계에 마음을 빼앗기면 공적 의무를 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통치자들과 보조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유명한 플라톤의 ‘처자공유제’ 주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옵니다. 플라톤은 사적인 가족의 철폐를 주장했던 것이죠. 문득 이런 의문이 듭니다. 통치자들은 모든 행복을 빼앗기는 것이 아닐까?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이나 행복은 도대체 뭘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그에 대한 플라톤의 대답은 아주 단호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함에 있어 유념하고 있는 것은 어느 한 집단이 특히 행복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 전체가 최대한으로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이 나라를 수립하는 목적이다.” 철인 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할 만한 단호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치가들에 대한 아주 엄격하고도 단호한 플라톤의 요구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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