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저   자
윤태옥(감수: 한동수)
출판사
미디어윌
출판일
2013년 06월
서   재







  • 집을 통해 광활하고 장대한 중국과 중국의 역사, 중국인을 이해하고자 한다. 10개월여의 기간 동안 상하이 번화가에서 네이멍구의 초원까지 2만 2,000km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며 중국인의 집에 대해 취재했다. 직접 사진을 찍고 집의 구조를 스케치하는 과정에서 그곳의 역사를 공부하고 그곳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하며 집에 얽힌 삶의 스토리를 모았다.



    당신은 어쩌자고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길을 나서면서

    기원 3세기 중후반 중국의 중원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불리던 이들이 있었다. 이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지독한 술꾼이 있었는데, 술을 마시기만 하면 옷을 벗어젖히곤 했다. 어느 날 누군가 그를 찾아와 알몸 추태를 힐난하자 유령이 대답했다. "나는 천지가 옷이고 집이 속옷인데, 당신이 어쩌자고 허락도 없이 내 속옷까지 들어오셨는가?" 정말 기발하고 재미있다. 청담(淸談)과 은일(隱逸), 기행(奇行)으로 뒤섞인 기막힌 발상으로 우리에게 던져주는 일깨움이 있다.


    집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가 담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와 할아버지, 조상들의 삶이 세월의 이끼처럼 퇴적되어 있다. 이 마을이 저 마을과 관계맺음이 어떠했는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친교하고, 그러면서 자연이란 거대한 환경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며 살아온 이야기들이다. 그렇게 반복되어 온 희로애락이 바로 문화이고, 서로 간의 관계맺음이 용광로처럼 들끓어온 것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집에 스며 있는 역사에는 잘났거나 못났거나 관계없이 그 시대 대다수를 이루었던 사람들, 곧 백성의 삶이 기록된 DNA가 묻어 있다.


    집에는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꿈과 희망도 서려 있다.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는 스타의 사진에, 대문의 복(福)이나 기둥의 대련에, 마당의 꽃에, 용마루의 상징물에, 내일을 위한 곡식을 쌓아두는 창고에, 후손을 보살펴달라고 조상을 기리는 사당에 담겨 있다.


    이제 이런 집들을 찾아 중국 넓은 땅으로 독자 여러분을 모시고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그들은 어떤 집에서 살아왔고, 지금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는지, 그 안에 쌓여 있는 그들의 문화와 역사는 어떤 것이고, 오늘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찾아보려는 것이다. 백성들이 살던 살림집, 곧 민가(民家)를 찾아보려고 한다.



    1장 사합원: 착한 신민들의 참한 살림집

    베이징 대원, 대잡원, 평방 - 권력이 담긴 높은 담장에서 백성들의 소박한 집까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베이징은 직장과 주거를 일체화시켜 한 블록 안에 직장과 주택, 그에 필요한 공공시설과 편의시설까지 모두 몰아넣었다. 이처럼 직장과 주택을 한데 결합한 것을 대원(大院)이라고 한다. 대원은 건축이란 측면에서 콘크리트 담장을 높게 둘러치고, 도시공학으로는 직장과 주택을 일체화한 폐쇄적인 소도시를 건설한 것이며, 눈으로 보면 정복 차림의 보안원들이 출입자들을 까다롭게 통제하는 곳이다. 대원은 개혁개방, 경제성장과 함께 소리 없이 해체되어 갔다.


    베이징의 사합원


    엘리트 계층을 위한 주택이 부족해서 대원이란 독특한 대형 주거지가 생겼는데, 백성들의 살림집은 이 시기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백성들의 집도 새로 짓기는 했지만, 인구증가를 따르지 못하고 기존의 집들을 조각조각 나눠 쓰는 게 보통이었다. 사합원(四合院, 베이징을 비롯한 화북지방 전통 가옥의 대표적인 배치방식으로 네 채의 건물이 모여서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ㅁ자 집)에서 방 한 개나 두 개를 한 가구에 배당해서 여러 가구가 같이 살게 하거나 사합원 안의 여유공간에 빼곡하게 쪽방을 지어넣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잡원(雜院) 또는 대잡원(大雜院)이라고 한다. 대잡원의 생활환경은 열악하다. 집 하나에 여러 가구가, 방 하나에 여러 식구가 함께 살아야 했다. 수용한계를 넘어선 인구 탓에 공중 화장실과 쓰레기장에는 오물과 쓰레기가 넘쳤다. 벽돌로 지은 쪽방은 여름에 더위를 참기 어려웠다. 이렇게 낙후된 생활환경은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력에 힘입어 새로 단장하고 있다.


    대원과 대잡원이 20세기 후반 베이징의 독특한 살림집이었다면 21세기에 새로 지어진 그들의 아파트는 어떨까. 또 그 아파트에 들어가지 못한 현대의 서민은 어디서 살까. 아파트는 21세기 현대 평균수준의 중국인들에게는 꿈이다. 그곳에 가지 못하는 서민들은 평방이란 곳에 살아야 한다.


    평방(平房)은 단층집이란 뜻이다. 붉은 벽돌 또는 흙벽돌로 지은 간단한 구조의 살림집으로 중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평방은 어느 지역에 특별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층 아파트나 고급 빌라가 아니면 거의 대부분 평방이다. 2012년 1월에 찾아간 평방은 베이징의 코리아타운인 왕징에서 직선거리로 8km 정도, 시내버스로 2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둥바라는 동네였다. 베이징 외곽의 농촌이었으나 도시화한 지역이다. 시내버스로 한 시간 정도면 베이징 무역센터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주거비를 아끼려는 사람들이 조그만 보따리를 둘러메고 찾아 들어가는 동네 가운데 하나다.


    이곳의 평방에 한 칸짜리 월세방을 얻어서 사는 한 처자를 만났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그녀는 1985년생. 당시 만 26세. 압록강 하구의 단둥 근처 펑청에서 출생한 만주족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2년간 미용을 배운 다음 만 스무 살 되던 2005년 옷가방만 챙겨서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철문을 열면 현관 겸 주방 겸 다용도 공간, 그 안에 침실 문이 보인다. 커튼으로 어설프게 가린 창 앞에 고무장갑과 행주가 걸려 있다. 침실에는 자잘한 물건과 옷이 가득 채워져 있다. 거금 3000위안을 주고 산 노트북도 놓여 있다. 이것으로 인터넷을 뒤져서 디자인을 독학으로 배운다. 그녀의 미래가 가느다랗게 달려 있는 세계로 열린 창이다. 화장실은 공중 화장실을 써야 한다. 월세는 200위안, 인터넷 사용료가 50위안이고 전기세까지 포함하면 300위안 정도가 고정적인 주거비다. 시내 아파트의 지하에 살아도 이 정도 크기의 월세방은 500위안이 들어가 300위안을 아끼는 것이다.


    이것이 농촌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와 열심히 사는 젊은 여자의 살림공간이다. 그녀의 고단한 삶과 소박한 꿈이 읽히는가? 어딜 가나, 누구나 꿈이 있다. 그 꿈이 사람을 살게 한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똑같다.



    2장 물산이 풍요로운 강남의 건축문화

    쑤저우·항저우 강남수향 - 물길로 이어지는 풍요로운 백성의 노래

    상하이에서 쑤저우 방향으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로 주변에서 수많은 물을 보게 된다. 강이나 저수지는 물론 석탄을 그득 실은 납작한 배들이 줄지어 다니는 운하, 쪽배가 유려하게 빠져나가는 가느다란 수로, 그리고 크고 작은 양어장까지. 수면이 육지보다 더 넓고 수로가 육로보다 더 촘촘해 마을이 물 위에 떠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창강 하류의 이런 마을을 강남수향(江南水鄕)이라고 한다.


    수향은 살림집 하나하나가 물에 기대고 있고, 조금 큰 집은 담장 안쪽까지 물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길은 한쪽은 물길이고 한쪽은 뭍길이다. 물길은 저수지나 운하, 강으로 통하면서 마을에서 마을로 이어진다. 밤에 등을 밝히면 물에 비친 등불에 그윽한 정취가 가득 차는 수향.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경이라 더욱 매력 있고 특색 있는 여행지로도 주목을 받는다. 강남수향으로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는 쑤저우의 저우좡, 퉁리, 루즈, 저장성 북부의 난쉰, 시탕, 우전 등이 꼽힌다.


    (강남수향의) 수로는 사방의 농촌과 도시를 연결해주었고, 화물운송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육로는 보행에 적합한 수준으로 좁았지만 점포에서 진열한 상품들이 길까지 나오기도 했다. 행인들은 진열된 상품 가운데로 지나갈 정도로 임의롭고 시장처럼 항상 시끌벅적했다. 길 위로 지붕을 얹거나 의자를 설치해서 행인들이 비와 바람을 피하거나 잠시 쉬어 갈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들을 기루(騎樓)라고 하는데 남방 도시 가로의 특색 가운데 하나다.


    살림집은 상업적 필요에 의해 물과 접해 있고 뭍으로도 열려 있다. 1층에선 장사를 하고 2층이나 후면에 살거나, 점포 뒤에 공장을 차리는, 주거와 생산, 판매가 일체화된 독특한 주거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수로가 워낙 촘촘한 탓에 다리도 많다. 유명한 다리들도 많다. 저우좡의 쌍교(雙橋)도 유명하다. 수로가 T자 형태로 만나는 곳에 세워진 세덕교와 영안교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세덕교는 반원의 아치교이고, 영안교는 평평한 석판을 가로놓은 석량교다. 이 다리는 1980년대 천이페이라는 중국 화가의 손을 통해 중국 문화를 서방 세계에 알리는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84년 미국에서 고향의 회억-쌍교라는 작품을 한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그림을 미국의 한 석유사업가가 구매했고, 그가 중국을 방문할 때 덩샤오핑에게 선물하면서 민간외교의 상징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1985년에는 UN에서 이 그림을 기념우표로 발행하면서 쌍교가 더욱 유명해졌다.


    지금도 수많은 중국인이 기념사진을 찍는 다리다. 작은 다리에 역사가 쌓이고, 문화로서 고향이 되어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내려앉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의 삶이 진하게 묻어 있는, 작지만 위대한 건축물이 아니겠는가.



    3장 토루와 조루: 황제는 멀고 산은 높다

    푸젠성 객가 토루 - 전란을 피해 숨어든 유민들의 보금자리

    중국의 전통주택 가운데 사각형 또는 원형으로 3∼4층 높이의 단단한 흙벽을 두르고 있는 커다란 집에 수십 가구에서 100여 가구가 함께 사는 신비한 주택을 TV나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푸젠성, 광둥성 등지의 객가인(客家人)들이 사는 토루다. 3∼4층 높이의 흙벽을 지칭해 토루(土樓)라고 한다. 토루는 외벽이 두텁고 대문이 튼튼해서 대문만 닫아걸면 성채다. 이번에는 객가 토루로 들어가 그 속에 쌓여 있는 중국 역사의 한 흐름을 차근차근 음미해보자.


    중국 대륙에서는 대규모 유민(流民)이 다섯 차례 발생했다. 전부 북에서 남으로의 이동이었다. 1차는 한나라가 멸망한 삼국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였고, 2차는 당나라가 기울면서 안사의 난, 황소의 난에 이어진 오대십국의 혼란기였다. 3차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이 차례로 남하하여 송나라를 멸망시킨 시기, 4차는 명말 혼란기, 5차는 청말 태평천국의 난이 대륙을 휩쓸던 시기다.


    이런 혼란기에 백성들은 극심한 전란을 피해 농토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남으로, 남으로 힘겹게 피난했으니 이들이 객가인의 선조다. 고향과 농토를 버리고 남천을 감행한 이들은 창강을 건너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갔다. 가장 많은 사람이 이주한 곳이 장시성, 푸젠성, 광둥성이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이 객가의 땅이다.


    객가인들은 생존과 생산, 이주와 전쟁 모두 혈족이 단결하여 헤쳐왔기 때문에 대가족 또는 군사문화적 요소가 강했다. 물론 객가인들이 연고도 없는 산지로 들어가 농토를 개간하고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현지인에게는 침략이었고, 느닷없이 굴러 들어온 재앙이었다.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이어졌고, 생존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도적 떼가 되어 기습과 약탈로 연명하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살림집, 한 마을이 모두 한 집에 모여 사는 집이 바로 토루다. 토루의 가장 큰 특징은 세 가지다.

    푸젠성 객가 토루



    첫 번째는 대가족 집체주택이다. 이주와 정착 모두 대가족이 힘을 합쳐야 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다. 두 번째 특징은 방어성이다. 도적 떼도 적지 않았고 야생동물 역시 일상생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상이한 문화적 요소들이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토루의 살림집들은 벽체 안쪽으로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외벽 사이에 보를 놓은 목가구 구조다. 목가구 구조는 현지의 간란식(干欄式) 조각루(弔脚樓)와 유사하다. 방이 표준화된 것은 군영건축(軍營建築) 요소이고, 조당은 유교적 종법제도의 요소이며, 목가구는 현지 건축의 요소다. 토루는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자연스레 결합된 것이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민족분류 또는 객가문화 연구가 시작되면서 뤄샹린이란 학자가 객가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말을 객가인들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일반화되었다고 하는데, 또 다른 해석으로 객가인들이 손님들을 기꺼이 맞이하면서 손님이 머물 수 있는 집이라고 표현한 말이라고도 한다.


    객가인들이 손님을 반가이 맞아주었다고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살던 곳을 떠나 스스로 객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 같다. 외지에 나가 새로운 삶을 펼치는 것이 몸에 배었는지 타이완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로, 또다시 미주와 유럽으로 이민을 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태양이 있는 어디에나 객가인이 있고, 땅 한 쪽만 있으면 어디나 객가인 마을이 있다고 한다. 바로 화교들이다.



    4장 고난 속에 피어난 꽃 소수민족

    후난성·구이저우성 먀오족 조각루 -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이 고단한 몸을 쉬던 집

    먀오족의 조각루는 집을 지면에서 띄어 올린 간란식 주택으로 산지에서 주로 나타난다. 집의 한쪽은 산이나 계곡 또는 강가의 경사면에 앉히고, 다른 한쪽은 경사면 아래에서 세워 올린 기둥으로 받치는 구조다. 산에 지을 때에는 낮은 곳을 향하게 하고, 강가에 지을 때에는 강을 등지고 길을 향해 앉힌다. 집을 받치는 나무기둥이 늘어뜨린 다리 모양이라 조각루라고 하는데, 먀오족들은 반변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사에 짓는 이유는 집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먀오족 마을 가운데 조각루가 아름다운 마을이 몇 개 있으니 후난성 서부의 펑황고성과 구이저우 중부의 시장먀오자이 두 곳이다. 펑황고성은 중국인들이 가장 아름다운 옛 마을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아준다. 후난성 성도인 창사에서 서쪽 330km 정도이고 장자제 서남쪽 150km 정도인데, 먀오족과 투자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펑황고성이 유명한 이유는 이 마을을 관통하는 퉈강(쓰촨성의 퉈강과는 다른 강) 강가에 늘어선 고풍스럽고 소박한 조각루들 때문이다. 양쪽 강변에 조각루를 받치고 있는 촘촘한 기둥이 독특하다. 밤이 되면 기둥을 비추는 조명이 강물에 반사되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진다. 강변 길에는 청춘남녀 여행객들이 모여들어 펑황고성 전체가 낭만으로 가득 차곤 한다.


    필자는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에게 장자제를 여행한다면 펑황고성까지 가보도록 권하곤 한다. 후난성 창사에서 출발하여 장자제와 펑황고성을 찾아보고, 구이저우성으로 넘어가 퉁런을 거쳐 카이리 외곽의 시장먀오자이까지 찾아간다면 아주 멋지고 의미 있는 먀오족 기행이 된다.


    펑황고성(왼쪽 상·하)과 시장먀오자이(오른쪽 상·하)


    시장먀오자이는 구이저우성 제2의 도시인 카이리 외곽이다. 인구 6000여 명의 99%가 먀오족으로 중국에서 먀오족이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다.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고 산비탈의 조각루가 경이로운 마을이다. 펑황고성의 조각루가 강가에 늘어선 것과는 달리 시장먀오자이는 양쪽 산비탈에 조각루가 빼곡하다. 마을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새벽에 햇살이 비치면 촘촘한 비늘이 반짝이는 듯하고, 밤이 되면 집집이 켜둔 전등이 향촌의 멋진 야경을 연출한다. 도시의 고층 빌딩이나 공원의 경관 조명으로는 연출할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조각루 한 채 한 채를 들여다봐도 먀오족의 소박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2층에 만들어진 미인고(美人靠)라는 먀오족 특색의 건축양식이 눈길을 끈다. 미인고는 밖으로 낸 2층 거실의 창문 하단에 달린 것으로 일종의 붙박이 의자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을 계자난간이라고 한다. 기대앉아 바람을 쐬거나 햇살을 받으면서 수를 놓고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멀리 내다보면 산 아래 계곡이나 건너편 마을이 보이고, 아래로는 지나가는 이웃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시장먀오자이의 야경은 바로 미인고에 하나씩 켜둔 전등이 연출하는 것이다.


    필자가 막연히 알고 있던 먀오족 이야기를 훨씬 뛰어넘는 최근의 학술연구 성과를 만나게 되었다. 역사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먀오족의 선조는 고구려 유민이란 것이다. 김인희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교수가 밝혀낸 고구려 유민 또는 먀오족의 남천사, 1300년에 걸친 눈물겨운 간난고투의 노래다. 청나라 시대에 특히 먀오족의 수난이 심했다. 청나라는 그 이전의 소수민족 자치제도인 토사(土司)를 폐지하고, 중앙정부가 보내는 관리가 통치하도록 했다. 이것을 개토귀류라고 하는데, 이에 저항하는 소수민족과 토착민들을 잔혹하게 토벌했고 이 가운데 먀오족이 수없이 희생되었다.



    5장 멀고 먼 곳의 소박한 사람들

    윈난성 모쒀족 목릉방 - 지금도 모계사회를 이루고 사는 신비로운 여인국

    윈난과 쓰촨 경계에 걸쳐진 아름다운 루구호 인근에 사는 모쒀족은 산림이 울창한 지역에서 통나무를 다듬어 목릉방(木楞房)이라고 하는 전통주택을 짓고 산다. 이들의 살림집에는 모계사회의 독특한 습속과 특이한 문화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이들의 살림집을 찾아가 모계사회의 속내를 탐방해보자.


    집은 나무로 만든 것이다. 원목의 양 끝을 다듬은 다음, 가로세로로 겹겹이 쌓아올려 우물 정(井) 자 형태로 벽체를 만들고, 지붕은 목판이나 기와를 올린다. 이런 집을 목릉방이라고 하는데 대량식, 천두식 구조와 더불어 중국 목조건축의 대표적인 구조법 가운데 하나다. 목릉방의 세 칸짜리 2층 네 동이 ㅁ자를 이루면 정간식 합원(井干式 合院)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목조건축의 구조를 귀틀 또는 방틀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강원도 산간지방이나 울릉도 등지에서 볼 수 있었다.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 맞은편의 정방, 정방 왼쪽의 경방(經房), 오른쪽의 화루(花樓), 대문이 있는 문루까지 네 동이 마당을 둘러싸는 구조다. 정방은 주택의 중심인데 할머니의 방과 주방, 식량창고 그리고 생사간(生死間)이라는 특이한 용도의 방들이 서로 붙어 있다. 정방 전체를 할머니 방이라고도 한다.


    모계사회인 만큼 집안의 가장은 여자다.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의 일은 할머니가 가장으로서 하는 일들이다. 모계사회를 한마디로 한다면 남녀 모두 평생 어머니 집에서 산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어머니의 집에서 살고, 나이가 들면 할머니의 남자형제로서 할머니를 보좌한다. 우리 관념으로는 그 속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13세 미만의 아이들은 할머니 방에서 태어나고 자란다는 것이다. 할머니 방 안쪽에서는 생사간(生死間)이라고 하는 방이 있는데, 생사간은 출산의 공간이지만 장례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다.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할머니의 방을 중심으로 하는 정방은 모계사회의 가족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축공간이다.


    정방의 오른쪽에는 여자들이 기거하는 화루가 있다. 1층은 창고로 사용하고, 2층에는 두 칸에서 네 칸의 방이 있는데 화방(花房)이라고 한다. 성인 여자들이 기거하는데, 큼지막한 창문과 화려한 침상이 특징이다. 화방의 창문은 채광과 통풍이라는 통상적인 기능 이외에 남자의 출입구가 되기도 한다. 주혼(走婚)이라고 하는 모계사회의 독특한 혼인습속 때문이다. 그래서 화루에 미성년 여자가 기거하는 경우에는 촘촘한 창살로 창문을 막아버린다.


    살림집은 건축만으로 보면 특별하지 않아 보이지만, 생활이 담기고 세월이 쌓여 민족문화로 형성되면 그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스며들게 된다. 모쒀족의 집도 방마다 그들의 독특한 문화가 깊이 새겨져 있다.


    모쒀족을 거론할 때면 항상 루구호라는 호수가 한 묶음으로 등장한다. 루구호가 고원의 명주(明珠)라고 불릴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루구호는 여의도의 다섯 배가 넘는 면적인데, 물이 맑고 투명하여 11m 깊이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인근의 구릉지대에 올라서서 보면 호수 속에 파란 하늘이 내려앉은 것처럼 아름답다. 나와 다른 것들을 보면서 세상이 넓고 크고 다양하다는 것을 느끼는 게 여행이라면 윈난의 루구호를 찾아 모쒀족의 신비한 토속문화를 느껴보는 것도 좋다.



    6장 거대한 역사가 몰아쳤던 북방

    만주 조선족 초가집 - 우리 동포는 왜 그곳까지 가서 살게 됐는가

    만주에 우리의 고즈넉한 전통 살림집들이 있다. 바로 조선족 동포들이 사는 초가집이다. 만주의 초가집에서조차 혹한기의 에너지가 핵심으로 읽힌다. 불을 피워 만든 열기를 잘 보존하며 혹한을 견디는 아궁이와 온돌이 바로 그것이다. 아궁이와 온돌 구조는 우리 조선족 동포뿐 아니라 한족이든 만주족이든 또는 다워얼족과 같은 소수민족이든 만주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마다 문화가 달라 각기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초가집의 온돌방은 좌식생활 탓에 방바닥 전체를 온돌로 만든다. 한족들은 입식생활을 하기 때문에 침상만 온돌이고 나머지 공간은 신을 벗지 않는 지면으로 되어 있다. 만주족의 온돌방은 그 중간 형태로 ㄷ자 형태로 온돌을 들인다.


    만주 초가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정주간(鼎主間)이다. 정주간은 부뚜막과 방바닥의 높이가 같게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벽체가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개방된 부엌 겸 거실이다. 우리나라 중부나 남부에서는 보기 어려운 함경도 지방의 특징이다. 취사를 하면 열기가 구들을 통해 방으로 직접 전달되는 동시에 부뚜막에서 데워진 공기도 함께 퍼지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된 것이다.


    이 정주간은 일상생활의 중심이다. 온돌 쪽으로는 방들이 이어지고, 반대편으로는 저장고와 우사가 연결된다. 취사는 물론 오락과 휴식의 공간이고, 작업공간인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는 교류의 공간이다. 그런데 뜨거운 불에 기름을 둘러 볶아내는 중국식 음식문화가 섞이면서 정주간에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름이 섞인 연기가 실내 곳곳에 들러붙는 것이다. 그래서 정주간과 부뚜막 사이에 미닫이가 열린 벽체를 치기도 한다.


    외관에서 가장 도드라진 것은 역시 지붕이다. 초가도 있고 기와도 있다. 기와는 만주의 다른 민족들도 사용하지만 볏짚을 올리는 것은 조선족 가옥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지붕의 형태는 사방으로 경사면을 내는 우진각지붕이거나 앞뒤 양면만 경사를 내는 맞배지붕이다.


    초가지붕은 멀리서 보면 한적한 강가에 띄우던 나룻배를 엎어놓고 햇볕에 말리는 것 같다. 용마루에서 처마로 흘러내리는 선과 면의 부드러움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볏짚이란 재료에서 느끼는 두툼하고 푹신한 느낌과 하얗게 칠한 회벽과의 조화도 참 아름답다. 우리의 마음속에 시골이라는 단어가 주는 행복한 느낌 그대로다.


    만주의 초가집


    지금 만주에서는 초가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 가운데 필자가 정말 시골다운 편안함을 느꼈던 곳으로 안내해보려고 한다. 옌볜 조선족 자치주와 무단장시 중간에 닝안시가 있는데, 그 외곽에 있는 샹수이촌이란 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 중국 관광지로는 최고 등급인 5A로 분류되는 징보호라는 아름다운 호수도 있고, 발해의 상경용천부 유지도 4km 정도에 있다. 자연과 역사와 인문적 요소를 함께 맛볼 수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


    상당수의 조선족 동포는 마을을 떠났지만 일부 조선족 동포와 그들의 초가집이 남아 있다. 샹수이촌의 초가집, 마을에 들어서면 허리춤 높이의 목책으로 얼기설기 세운 담이 정겹다. 그 위로 초가지붕이 드러나고, 배불뚝이 굴뚝은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의 느낌으로 눈에 들어온다. 잠글 것도 없는 낮은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텃밭이다. 집은 창고와 세 칸짜리 본채, 화장실이 옆으로 나란히 서 있고, 마당 한쪽에는 땅을 파서 만든 저장고의 낮은 문이 낯선 방문객을 빼꼼히 쳐다보는 듯하다. 본채로 들어서면 정주간의 부뚜막에 크고 작은 솥이 세 개 걸려 있다. 부뚜막은 곧바로 온돌 바닥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구마라도 찌면 아이들이 가마솥 뒤에서 재잘거리며 받아 먹을 것 같다.


    비록 가난한 집이기는 해도 할머니의 온정이 서려 있고 텃밭의 풋풋함에 잃었던 생기가 되살아날 것 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실생활에서는 이미 사라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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