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요약 

평범하게 비범한 철학 에세이

저   자
김필영
출판사
스마트북스
출판일
2023년 06월
서   재







  • 철학은 어떻게 삶의 의미가 될까? 우리의 삶은 평범하기도 하고 비범하기도 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포착한 반짝이는 비범한 순간들, 지극히 평범하지만 누구나 비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평범하게 비범한 철학에세이


    철학은 어떻게 삶의 의미가 되는가?

    죽고 싶지만 철학은 하고 싶어 _비트겐슈타인, 마틴 셀리그만

    20세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뜻 보기에는 비극적 삶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평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모두 포기했으며, 조용한 산골에 들어가 홀로 외롭게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암 판정을 받은 후 죽음을 앞두고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이 멋진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아마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왜 자신의 삶이 멋진 삶이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마틴 셀리그만은 행복한 삶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행복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즐거움’입니다. 즐거움은 본능과 욕구가 충족될 때 생기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좋은 곳을 여행하고, 그냥 그렇게 재미있게 사는 것이죠. 문제는 이러한 류의 즐거움은 쉽게 질린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도 한두 번이고, 여행도 며칠 다니다 보면 힘들기만 해요.


    행복한 삶의 두 번째 조건은 ‘몰입’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때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무아의 지경을 경험합니다. 몇 시간이 단 몇 분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셀리그만은 이러한 몰입의 상태를 자주, 그리고 오래 가지는 것이 행복해지는 방법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삶의 세 번째 조건은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관적으로 어떤 행위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죠. 셀리그만은 삶의 의미를 성취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고 나니 행복해지는 것은 정말 어려워 보입니다. 즐겁기도 해야 하고, 몰입도 해야 하고, 거기에다가 의미까지 있어야 하니 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이것들을 다 가질 수 있겠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행복이 사치라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까요? 이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5남 3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오스트리아의 철강회사를 소유한 엄청난 부자였어요. 브람스, 슈만, 말러, 쇤베르크 같은 음악가들이 비트겐슈타인 궁에 초빙되어 연주를 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 집안에는 우울증 내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첫째 형, 둘째 형, 셋째 형이 모두 자살을 했습니다. 특히 셋째 형은 동성애적 성향을 비관해서 자살한 것이라고 추정하는데요. 비트겐슈타인도 동성애자(양성애자)였어요. 지금이야 동성애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당시 동성애는 윤리적으로도 문제였고 법적으로도 불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비트겐슈타인도 평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청소년기에 비트겐슈타인은 기계와 공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 원리』를 읽고 수리철학에 매료되어 캠브리지 대학에 강사로 있던 러셀을 찾아갑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철학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습니다. “내가 바보인지 아닌지 말해주세요. 내가 바보라면 비행기 조종사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철학자가 될 겁니다.”


    그러던 중 1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군에 자원입대를 합니다. 평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보니 죽음과 대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장 위험한 보직을 자원했고 퇴각 명령도 듣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포탄이 떨어지는 참호 속에서 글을 계속 썼다는 것입니다. 그 글은 나중에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에서 마무리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바로 『논리철학 논고』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트겐슈타인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사둔 미국 채권이 전쟁이 끝나자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산을 형제들과 지인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고 자신을 위해서는 방 한 칸과 몇 점의 가구만 남겨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갈 때는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출발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장과 포로수용소에서 쓴 『논리철학 논고』를 출판합니다. 그는 이 책으로 자신이 모든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생각했고, 이제 학계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시골로 내려가서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이번에는 나이가 많아서 군인으로 입대하지 못했지만 야전병원의 조수로 군복무를 자원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또다시 은둔 생활을 합니다.


    1951년 62세가 되던 해, 비트겐슈타인은 전립선암 선고를 받습니다. 의사가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평생을 자살 충동에 시달렸으니 고통스러운 삶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에게 내 삶이 참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즐거움은 없었지만, 그는 철학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니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그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행복은 물론 좋습니다. 즐겁고, 몰입하고, 의미 있는 삶은 좋은 것이죠.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면, 그래서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즐거움은 그냥 마음의 상태일 뿐이니까요.


    그러니 ‘즐거움’은 우리의 인생에서 후순위로 두고, ‘몰입’과 ‘의미’에 집중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우리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에 몰입하고, 또 거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도 죽음을 앞두고 비트겐슈타인처럼 “내 삶은 멋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나에 관한 이야기

    낯설고도 낯익은 내 안의 또 다른 나 _프로이트, 라캉, 「지킬 박사와 하이드」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인간의 이중성을 소재로 하는 소설입니다. 지킬 박사는 인간에게는 선한 인격과 악한 인격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는 두 개의 인격을 분리해내는 화학 약품을 만드는 데 성공하죠. 약을 마시면 내면에 있는 악한 인격이 나타납니다. 그 악한 인격이 바로 하이드입니다. 지킬 박사는 낮에는 젠틀한 신사이지만, 밤만 되면 약을 먹고 하이드가 되어 파렴치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금지된 욕망을 해소합니다. 이렇게 한동안 하이드와 공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이드의 힘은 강해집니다. 나중에 지킬 박사는 약을 마시지 않아도 하이드가 되어 버립니다. 이제 하이드는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됩니다. 결국 지킬 박사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이드를 없애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죠. 그것이 자신 안에 있는 괴물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신에는 의식의 세계가 있고, 무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의식의 세계에는 지킬 박사가 살고, 무의식의 세계에는 하이드라는 괴물이 살고 있습니다. 쾌락을 쫓고, 금지된 것을 욕망하고, 도덕과 양심에 얽매이고 싶지 않는 또 다른 내가 있죠. 무의식 속의 괴물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억압하면 할수록 괴물은 더 강하게, 더욱 반복적으로 나타나죠. 그렇다면 우리는 그 괴물을 완전히 억압할 수 있을까요?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프로이트의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언어적으로 해석합니다. 라캉은 의식은 언어의 세계이고, 무의식은 언어를 벗어난 세계라고 합니다. 언어의 세계를 상징계, 언어를 벗어난 세계를 실재계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지킬 박사는 상징계에 존재하고, 하이드는 실재계에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작가는 하이드의 모습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실재계는 언어를 벗어난 세계, 언어를 넘어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실재계는 이처럼 상징계에 의해 배제된 세계입니다. 그래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찌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캉은 실재계는 상징계의 찌꺼기이면서, 동시에 상징계의 중심이라고 합니다. 즉, 실재계는 상징계 밖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상징계의 중심에 결핍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배제된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합니다. 우리 안의 하이드는 호시탐탐 돌아올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이드를 억압하면 할수록, 배제하면 할수록, 하이드는 우리 안의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킬 박사는 하이드의 귀환을 막기 위해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하이드와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이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나는 글을 쓰면서, 그리고 여러분은 이런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하이드가 귀환하는 것을 지연시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평범하게 비범한 우리들의 이야기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회색 지대 _푸코, 정신질환 통계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광기’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광기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광기와 이성은 특별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푸코의 이러한 생각을 확장하면,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은 어떻게 구분될까요?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는 아폴론 신의 예언을 전하는 무녀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무녀들이 실제로 아폴론 신의 목소리를 들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의 예언이라는 것이 무녀들이 유황가스를 맡고 환각 상태에서 횡설수설한 것을 사제들이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중세 유럽 왕들의 궁정에는 광대들이 있었습니다. 노래, 만담, 곡예, 마술 등을 하는 일종의 엔터테이너였는데요. 이들은 바보처럼 헛소리를 하고 왕을 조롱하는 등 광인 흉내를 내기도 했죠. 그런데 왕이 단지 재미를 위해서 광대를 궁정에 들인 것은 아닙니다. 광대의 조롱이 왕에 대한 비판과 충고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광대들은 겉보기에는 바보 같지만 사실은 현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정의 광대를 ‘현명한 바보 광대’라고 합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무녀와 광대 같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델포이 신전의 무녀에게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고, 궁정의 바보 광대에게는 왕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이런 광인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7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상황이 바뀝니다. 이제 사람들은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하고, 비정상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대감금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때 감금된 사람들이 범죄자, 거지, 부랑자, 게으름뱅이, 무신론자, 이교도, 그리고 광인들이었습니다. 프랑스 파리 전체 인구 중 1%가 감금되었죠. 이때 감금된 곳이 나중에 종합병원이 됩니다. 감금된 사람들의 특징은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본 것이고,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기준을 노동을 하느냐, 노동을 하지 않느냐로 본 것이죠.


    18세기 후반 산업이 발달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집니다. 그러니 노동자 한 사람이라도 아쉬웠겠죠. 그래서 비정상인들을 교화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두들겨 팼습니다. 범죄자, 거지, 부랑자, 게으름뱅이 등은 금방 교화가 됩니다. 교화된 이들은 감금에서 풀려나 노동자가 됩니다.


    이제 교화가 안 되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바로 광인들이죠. 이때부터 광인들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광인들은 그냥 노동을 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자라는 것이죠. 광인들에게 약물을 주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종합병원은 정신병원으로 간판을 바꿉니다.


    푸코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광기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광기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16세기 이전에 광인들은 보통 사람들 중에 그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17세기에 광인은 그저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18세기 후반이 되면 비로소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가 됩니다. 즉, 광기라는 개념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이런 문제가 나타납니다. 1972년 스탠포드 대학의 로젠한 교수는 재미있는 심리학 실험을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 여덟 명이 정신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환청이 들린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랬더니 정신과 의사는 일곱 명에게는 정신분열증, 한 명에게는 조울증이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이들은 모두 정신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는데요. 말하자면 거짓말로 입원을 한 것이죠. 이들은 입원 후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정상적으로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들이 진짜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로젠한의 실험에는 많은 비판이 따랐습니다. 의사를 속였다는 윤리적 비판도 있었고, 환자가 거짓말을 하는데 의사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냐는 반론도 있었죠. 하지만 로젠한의 실험이 계기가 되어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기준이 대폭 보강됩니다.


    로젠한 실험을 통해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객관적 기준을 만들었지만, 그 객관적 기준 자체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정신장애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내는 것이란 거죠. 사람들의 어떤 행위들을 모아 범주화하고, 거기에다가 OO장애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동성애입니다. DSM-2에서는 동성애가 정신장애이지만 DSM-4부터는 정신장애라고 보지 않습니다. 사회적 맥락에 따라 동성애가 정신장애이기도 하고 정신장애가 아니기도 한 것입니다.


    광기와 정신장애의 개념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달라져 왔습니다. 즉, 광기나 정신장애는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입니다. 따라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기준도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정상인지, 누가 비정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임의의 기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것을 결정할까요?


    푸코는 시대마다 동작하는 무의식적 인식의 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무의식적 인식의 틀을 ‘에피스테메’라고 합니다. 예컨대 16세기에는 16세기의 에피스테메가 있고, 17세기에는 17세기의 에피스테메가 있으며, 18세기에는 18세기의 에피스테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념할 점은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는 굉장히 넓은 회색 지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비정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성격장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렵니다. 나는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넓은 회색 지대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정상이 아니라도, 나는 적어도 회색 지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계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_라이프니츠, 브랜든 카터, 김한승

    우주는 도대체 왜 존재할까요? 정말로 이상하지 않나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상태잖아요. 그런데 왜 우주가 존재할까요? 왜 무언가가 존재할까요? 생각해 보면 이런 놀라운 물음으로부터 철학의 존재론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사실들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진공의 에너지 밀도는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11056입니다. 그런데 진공의 에너지 밀도가 이 값보다 0.0000000000…1%만 컸다면 우주는 진작에 대함몰로 수축되어 버렸을 것이고, 이 값보다 0.0000000000…1%만 작았다면 산산이 흩어져버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약 1억 5,000만 킬로미터인데,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너무 뜨거워서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멀었다면 너무 차가워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요. 그러니 지구에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것이 기적이죠.


    또한 우리 모두는 5,000만 개의 정자들의 경쟁에서 1등을 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로또에서 1등 당첨 확률이 800만 분의 1인데, 인간이 태어날 확률은 5,000만 분의 1입니다. 이것도 기적이죠. 그러니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셈입니다.


    이제 다시 물어볼게요. 우주는 도대체 왜 존재할까요? 나는 도대체 왜 존재할까요? 왜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상인데, 왜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자꾸 일어날까요?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신이 진공의 에너지 밀도를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11056으로 정확히 맞추어 만들었고,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를 정확하게 1억 5,000만 킬로미터가 되도록 설계했으며, 5,000만 마리의 정자 중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장 빠른 꼬리를 달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가 존재하고, 지구가 존재하고, 내가 지구에 태어난 것은 신이 우주를 아주 정교하게 설계해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7세기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이와 같은 입장입니다. 라이프니츠의 충족 이유율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며, 모든 사건에는 그 사건이 그렇게 벌어질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이유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어떤 사건도 이유 없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우주가 왜 존재하고, 내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호주의 물리학자 브랜든 카터가 제시한 ‘인류원리’입니다. 인류원리는 아주 약한 것부터 아주 강한 것까지 약 30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약한 인류원리에 따르면, 우주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관찰되는 이유는 그것을 관찰하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어떤 나라에서 죄수를 공개적으로 총살시킨다고 합시다. 누구의 총에 맞아서 죽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 여섯 명이 동시에 총을 쏜다고 하죠. 그런데 총이 오래되어 가끔 고장이 납니다. 총 한 자루가 고장날 확률은 0.1%라고 해요. 천 자루 중에 한 자루가 고장난다는 얘기죠. 따라서 총 여섯 자루가 동시에 고장날 확률은 0.000001%예요. 그야말로 희박하죠.


    어느 날 총 여섯 자루가 모두 고장나서 사형수가 죽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죠. 사형수는 너무나 기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야. 하느님이 나를 살리라고 계시를 내린 거라고.” 그러면 간수는 뭐라고 할까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야.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네가 살아있기 때문이야. 내가 수십 년 동안 사형 집행을 해왔는데, 여태까지는 사형수들이 다 죽었어. 이제 확률상 운 좋게 살아남을 놈이 하나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게 너일 뿐이야.”


    간수의 말이 맞죠? 앞에서 약한 인류원리는 우주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관찰되는 이유는 그것을 관찰하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죠? 사형수가 존재하는 것이 관찰되는 이유는 사형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모여 사는 로또 마을이 있다고 합시다. 민수는 아버지가 로또에 당첨되어 로또 마을로 이사를 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로또에 당첨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로또에 당첨되었어요?” 민수가 기대한 대답은 “돼지꿈을 꿔서”라든지, “로또를 많이 샀기 때문에”라든지, “운이 좋았겠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가 로또 마을이니까.”


    인류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기가 로또 마을이니까”라는 식의 대답은 적절한 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민수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라 로또에 당첨될 수 있었던 비법, 즉, 원인이었으니까요. 로또 맞은 사람들은 로또 마을에서 그냥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로또 마을이니까요. 하지만 로또를 맞은 사람은 기적의 확률로 선택받은 비범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즉, 로또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가 ‘평범하지만 비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평범과 비범은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는 그냥 평범한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기적의 확률로 선택받은 비범한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우주는 0.00000…1%의 확률을 뚫고 존재하게 되었고, 우주에 생명체는 0.00000…1%의 확률을 뚫고 존재하게 되었으며, 우리 모두는 또 0.00000…1%의 확률을 뚫고 존재하게 된 존재입니다. 우리는 엄청 평범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엄청 비범한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평범하게 비범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하기에 타자와 차별 없이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동시에 우리는 모두 비범하기에 타자와 차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하게 비범한 존재이므로, 이처럼 타자와 동일성과 차이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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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